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에 점집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계통이 없는 점쟁이들을 명리학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김두규 제공

서기 1611년, 영의정 이원익이 임금에 오른 지 3년 차인 광해군 면전에서 말한다. “궁중에서 많은 점술이 행해진다고들 말합니다. 끊어야 합니다. 이런 것에 얽매이면 사리가 흐려져서 끝내 나라를 국정 혼란에 빠트릴 것입니다.” 광해군은 풍수쟁이와 점쟁이 주술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결국 실각한다.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이 황제 노릇을 할 때이다.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를 침략하였다. 제갈량의 후계자 강유가 황제에게 “군대를 일으켜 적을 막겠다”는 글을 올린다. 황제는 환관 황호에게 그 글을 보인다. 황호는 “강유가 공명을 세우려는 허튼 짓”이라며, 대신 용하다는 무당을 추천한다. 황제는 향기로운 꽃과 촛불, 그리고 온갖 재물을 차려 놓고 무당을 모신다. 자신의 용상에 앉혀 놓고 절을 하며 점을 치게 한다.

무당이 신들린 체하며 외친다. “나는 서천(西川·촉나라)의 토신(土神)이니라. 그대가 태평성대를 즐기고 있으면 몇 년 후에 위나라 땅이 절로 넘어올 것이다. 아무 염려 말라!” 하지만 촉나라가 함락되기 전 황제가 다시 무당을 찾았으나 달아나고 없었다. 촉나라는 그렇게 망했다.

오나라 마지막 황제 손호가 학정을 거듭하자, 좌승상 육개가 “주변 환관들을 물리치고 선정을 베풀 것”을 간하는 글을 올린다. 이 글을 보고 화가 난 황제에게 환관 잠혼이 점쟁이 상광을 소개한다. 황제가 상광에게 천하를 취할 방법을 물었다. 상광이 “경자년(庚子年)이 되면 폐하께서 푸른 덮개 가마(靑蓋·황제가 타는 수레)를 타고 낙양에 입성하실 것입니다”라고 점쳤다. 서기 280년 경자년, 진나라 군대가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항복한 손호는 ‘푸른 덮개 가마’를 타고 낙양으로 끌려간다.

촉·오의 마지막 황제 유선·손호는 환관과 점술에 의존하다가 망했다. 한(漢) 말의 황제는 10명의 환관[十常侍]에게 휘둘렸으나, 이 둘은 한 명의 환관 때문에 망했다. “십(十)상시가 일(一)상시보다 못하다”는 말이 나왔다.

소설 ‘삼국지’에는 유비·손권·제갈공명·관우·육손·장임 등 지도자들이 승려·도사·은사·고사(高士)들과 만나는 장면이 잠깐씩 등장한다. 그들에게 큰일의 길흉을 점치는 것이 아니었다. 난관에 빠졌거나 최종 의사 결정을 앞두고 답답할 때 ‘관점’이 다른 제3자의 한마디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같은 것이다. 정답은 자신의 내면에 잠복하고 있다. 고사(高士)의 한마디가 정답을 격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점과 신탁(神託)의 순기능이다.

유비·관우·손권 등이 만났던 고사들은 당대 최고 지성이었다. 반면, 유선·손호·광해군이 만났던 이들은 자아분열증에 시달리는 술사였을 뿐이다. 자아(주체)의식이 결핍된 이들이 점술에 빠지는 전형적 현상이다.

최근 신문과 방송에는 점술이 ‘핫’한 주제어로 등장한다. 일부 기자·앵커·패널들은 점치는 것을 일상 행위로 여기거나 점쟁이들을 ‘명리학자’라며 존칭한다. 현존 점쟁이들의 양성 과정은 불투명하며 그 ‘족보’가 없다. 과거 일본·중국과 마찬가지로 조선 왕조에서는 명과학(命課學)이 있었다. 점을 담당하는 관청·관리였다. 명과학에 합격하려면 ‘경국대전’이 정한 책들을 공부해야 했다. 시험도 1차와 2차에 나누어 치렀다. 1차는 ‘원천강’ ‘서자평’ 등 6개 과목, 2차는 ‘삼진통재’ ‘난대묘선’ 등 13개 과목을 통과해야 했다. 다행히 이 책들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좀이 슬어 너덜너덜하나 아직도 보관 중이다.

점쟁이와 ‘명리학자’들이 과연 이 책들을 읽기는 하였을까? 점쟁이를 ‘명리학자’로 존칭하는 기자·앵커·패널들은 이 책들의 존재 여부를 알기나 할까? 점쟁이와 그 고객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관전평을 하는 이들 모두 딱하다. 자아(주체)의식 결핍으로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귀태(鬼胎)적 현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