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가수 임영웅이 사는 아파트예요.”
서울 합정역 앞 39층짜리 아파트 앞에 일행이 모여들었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매매가 24억원(163㎡)에 거래된 곳이다. 물론 임영웅은 그보다 두 배 더 비싼 펜트하우스에 거주하고 있다. 아파트 단지 앞 길바닥에서 모임의 리더(36)가 이곳의 학군과 지형, 교통 편의에 대해 5분 정도 브리핑을 진행했다. 몇몇은 휴대폰 메모장을 켜 받아 적었고, 몇몇은 한참 고개를 꺾어 마천루를 올려다봤다. 캄캄한 밖, 가가호호의 내부에서 비현실적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자, 다음 아파트로 가시죠.”
일행은 무려 스물일곱 명이었다. 대부분 30대. 서울 각지에서, 경기도 파주·고양·화성·성남에서도 왔다. 지난 23일 쌀쌀한 토요일 저녁, 주말의 휴식을 반납한 채 콧물 훌쩍이며 남의 아파트를 배회하는 사람들. 이른바 ‘임장 원데이 클래스’ 수강생들이었다. 임장(臨場·부동산 현장 답사), 그러니까 집 보러 하루 날 잡아 단체 관광 하듯 떼로 몰려다니는 최신 풍속도. 매주 혹은 격주로 서초·용산·성수 등 지역을 달리해 주요 아파트를 돌며 설명을 곁들이는, 아파트 공화국의 기이한 트렌드. 포털 사이트에서 어엿한 ‘상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집 보러 가는데 돈을 낸다고? 참가비를 결제하고 그 무리에 섞여봤다. 한 남성은 “오늘이 열세 번째 참여”라고 말했다.
◇아파트를 향해 행군하라
이날의 임장 루트는 서교동~합정동~상수동 일대 아파트 8곳이었다. 역세권 대단지부터 나 홀로 아파트, 심지어 준공 반세기 넘은 주상복합(?)까지. “입지에 비해 평당 시세가 주변 대비 낮아 가격 경쟁력이 있는 곳”이라는 설명. 동네를 거닐며 주변 환경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게 목적이지만, 밤이라 어두워 뭐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골목을 가득 메우며 저벅저벅 행군하는 임장족(族)의 뒷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약 서른 명이 비좁은 주택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행인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뭐 하는 사람들이야?” 러닝 크루에 빗댄 ‘임장 크루’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앞장서 걷던 리더가 YG엔터테인먼트 사옥 옆 아파트에 멈춰 섰다. 깃발만 없을 뿐, 여행 가이드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중국인 관광객처럼 보일 법 했다. 재건축 전망 등의 짧은 설명을 마친 해당 리더는 “나 역시 투자자”라며 “올해만 아파트 400단지를 다녔다”고 말했다. 반포에 집을 샀다고도 했다. 공인중개사 자격증은 없어도 ‘임장 프로’인 셈.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내던 한 30대 여성은 “집 마련 걱정이 크던 차에 동호회 소개 어플에서 알게 돼 참가했다”며 “여럿이 다니면 미처 생각지 못했던 투자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유(有)주택자도 다수였다. 고민 끝에 경기도 광명에 자가를 구입했다는 30대 남성은 “언제일지 몰라도 꼭 서울로 ‘갈아타기’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반차 임장’ 상품까지
서울 아파트, 재산 증식의 절대적 방식으로 신봉되기 때문이다. ‘단체 유료 임장’이 생겨난 배경이다. 주말에 진행되는 게 보통이지만 인근 직장인을 위한 ‘오후 반차’ 클래스부터, 1회 8만원에 달하는 고가 상품도 있다. “하루 만에 지역 분석을 마스터한다”거나 “효율적으로 좋은 매물을 찾을 수 있다”고 홍보한다. 강의 2시간에 임장 2시간 코스로 이뤄진 한 유료 상품 리뷰를 살펴보니 “초보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사전 스터디하고 다 같이 임장하며 퀴즈도 풀면서 편하게 정보 습득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정도 값어치를 하는 걸까? 다시 말해 이걸 하면 정말 내 집 마련에 더 가까워지는 걸까? 다른 상품 리뷰를 살펴보니 또 다른 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심심하지 않게 짝꿍도 만들어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임장했네요.” “임장 모임 덕분에 ‘역시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이렇게나 재밌어하는 사람이었어’라고 다시 느꼈음.” 만남의 광장. ‘N차’ 참가자가 많은 데다 임장 이후 뒷풀이 식사가 이어지다 보니, 커플로 성사되는 경우도 꽤 있다고 한다. 같이 집 보러 다니다 한집에 들어가게 되는 인연, 어쩜 이것이 인기의 숨은 이유일지도.
◇공인중개사 반발… “업무 방해”
시선은 갈린다. 서울 강동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임장 크루’라는 단어만 들어도 불편해진다”며 “아침부터 소금 뿌리고 싶었던 적도 있다”고 했다. 체험 혹은 공부 차원에서 부동산에 매물을 요청해 집 안까지 둘러보는 일부 민폐족 때문이다. 화장실 수압까지 체크하고 갔는데, 알고 보니 임장 크루. 가짜 손님으로 인해 집 소개의 피로도가 커지면 실수요자를 놓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언제든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착각하는 분이 많은데요,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합니다.”
업무 방해 수준의 불청객이 끊이지 않자,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이달 초 ‘임장 클래스’ 운영업체 11곳에 주의·협조 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최근 많은 임장 크루들이 거래 의도 없이 정보를 얻거나 경험을 쌓기 위해 임장을 다니면서 공인중개사·임대인·임차인에게 부담과 혼란을 주고 있다는 민원이 다수 접수됐다”며 “임장 클래스가 긍정적인 학습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배려와 에티켓이 필수일 것이니 내부 규칙을 마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3억원 모으려면 얼마 걸릴까요?
대단한 투자 비법 같은 건 없었다. 이것이 본 기자의 생애 첫 ‘임장 크루’ 총평. 다만 운동 효과는 확실했다. 대략 2시간에 걸친 도심 산책, 허벅지가 뻐근했다. 일일 헬스장 이용권 끊은 셈 치기로 했다. 이날 임장 루트의 마지막 행선지, 상수동 한강변의 한 아파트 앞에서 리더가 크루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3억원 모으려면 몇 년 정도 걸릴 것 같으세요?” 4년, 7년, 10년…. 답은 천차만별이었다. 리더가 또 물었다. “요즘 은행권 1년 예금 최고 금리가 얼마일까요?” 대한민국 필부필부가 너나없이 부동산에 몰리는 이유를 내포하는 질문이었다. “우울하게 마무리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정말 파이팅입니다.”
지난 18일 통계청이 ‘행정 자료를 활용한 2023년 주택 소유 통계’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기준 주택 소유자는 1561만8000명으로 전년보다 30만9000명 늘었다. 그러나 40대 이하에서는 주택 소유자가 줄었다. 특히 2030 젊은 세대에서 감소 폭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다. 30대는 6만1000명, 20대 이하는 2만2000명 감소했다. ‘영끌’ 대출로 어렵사리 집을 매수했다가 고금리 부담을 버티지 못하고 내다 팔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가계빚(1913조8000억원)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주택담보대출 급증이 가장 큰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