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대) 2학년생 이의경은 동급생 유상규로부터 “고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 3월 3일)을 기해 일본의 부당한 지배에 맞서 시위를 할 것이고, 조선의 모든 학교 학생들이 이 시위에 가담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경성의전은 총독부가 운영하는 학교였고, 교수 전원과 학생 3분의 1이 일본인이었다. 사립학교 학생들은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들을 ‘반쪽짜리 왜놈’이라며 신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3월 1일 이의경을 비롯한 경성의전 학생들은 태극기와 전단을 준비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경성의전 조선인 학생의 20%에 해당하는 31명이 구금되었고, 79명이 퇴학당했다. 구금은 면했지만 학교에서 쫓겨난 이의경은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 ‘대한청년외교단’의 편집국장으로 기관지 ‘외교시보’와 항일 전단을 편집‧인쇄하는 업무를 주도했다. 그해 11월 대한청년외교단의 간부 8명이 체포되고 그 자신도 수배 명단에 오르자, 이의경은 고향 해주로 피신했다.
황해도 해주 천석꾼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의경은 어린 시절, 부친이 바깥채에 학식과 덕망이 높은 훈장을 초빙해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국권을 상실한 1910년, 11세에야 신식학교로 진학했다. 1913년 남편이 사망한 이후 천석꾼 큰살림을 오롯이 떠안아 경영하던 이의경의 모친은 의학을 공부하러 서울에 갔다가 경찰에 쫓겨 귀향한 약관을 갓 넘긴 외아들에게 유럽으로 망명을 권유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용기를 내거라! 너는 국경을 무사히 넘어 반드시 유럽에 갈 수 있을 거야.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말거라! 나는 네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마. 세월은 아주 빨리 지나간단다. 혹시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슬퍼 말거라! 너는 내 생에 가장 큰 기쁨이었다. 자, 내 아들. 이제 혼자 네 길을 가거라!”(‘압록강은 흐른다’)
이의경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밀입국했고, 상하이에서 중국인 신분으로 여권을 발급받았다. 1920년 유럽으로 망명한 이의경은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의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동양인 망명객이 유학하기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독일의 정치와 경제 상황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수년 동안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이어져 환율은 미화 1달러당 120억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이의경은 전공을 동물학으로 변경해 1928년 뮌헨대학에서 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의경은 한국인 최초로 ‘동물학 박사’가 되었지만, 독일인도 취업하기 어려웠던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에서 동양인 망명객이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의경은 독일 지식인들에게 서예와 한문을 가르치고, 일본인 유학생이 일본어로 쓴 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해 주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양심적인 독일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미륵’이라는 아명(兒名)을 필명으로 삼아 독일 잡지에 소설을 발표했다. 나치 집권기에는 독지가 자일러 박사의 뮌헨 근교 그래펠핑 저택에 거주하면서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집필했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서 독일인 880만 명, 전 세계에서 6000만 명이 사망했다. 독일인을 하나로 집결시켰던 옛 질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만, 새 질서가 확립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과거의 모든 질서가 파괴된 그 시간을 독일인들은 ‘0년’ 혹은 ‘0시’라고 표현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헐뜯고 비난했던 그 시간을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의미에서 ‘늑대의 시간’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독일에는 7500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절반 이상이 자신이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폭격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다른 곳으로 대피한 사람이 900만 명, 패전 이후 독일이 영유권을 상실한 주데텐란트, 슐레지엔, 동프로이센에서 쫓겨난 난민이 1400만 명, 강제노역과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이 1000만 명, 전쟁 포로로 잡혔다가 서서히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수백만 명이었다. ‘실향’과 ‘이산’은 독일인에게도 당면한 아픔이었다.
1946년 5월 이렇듯 물질적으로나 정신으로 모두 황폐해진 독일에서 이의경이 독일어로 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었다. 독일의 유명 출판사 피퍼(Pipper)가 패전 후 첫 번째로 출간한 작품이었다. 한국 소년 ‘미륵’이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신식학교에 진학하고, 서울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3‧1운동에 참여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유럽에 망명해 독일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까지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불길한 세상이 왔다고 말하는데, 실은 불길한 시대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왔을 뿐이라고 말해 줘. 마치 눈으로 뒤덮였던 긴 겨울이 지나고, 진달래가 피고, 뻐꾹새가 울면 봄이 시작되는 것처럼. 우리 시대도 지금 그런 것과 같다고 말이야.”(‘압록강은 흐른다’)
한국인 이의경이 한국에서의 추억을 기록한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뜻밖에도 전쟁으로 상처받은 독일인들에게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종전 이후 독일 작가들이 죽음, 폐허, 인간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작품을 쏟아낸 것과 달리, 이의경의 소설은 맑고 청아한 언어로 순수한 한국에서의 어린 시절을 섬세하게 그렸다. 독일인들은 이의경의 간결한 독일어 문체에 감동했고, 어린 ‘미륵’의 순결한 영혼에 매료되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4000만 독일 실향민에게 희망의 메시지였다. 독일의 한 잡지사는 ‘압록강은 흐른다’를 “1946년 독일어로 출간된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했고, 독일의 전 지역 신문 잡지들에서 100여 편의 서평이 실렸다. 독일 여러 주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소설의 성공으로 이의경은 1947년 뮌헨대학 동양학부에 강사로 임용돼 맹자, 장자 등 동양철학과 한국어를 강의했다.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지 19년 만에 야인 생활을 끝내고 대학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석 달 전인 1950년 3월 위암으로 사망해 그래펠핑 묘역에 안장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지구 반대편 독일에서 ‘진정한 휴머니스트’ 이의경이 독일어로 풀어낸 한국 이야기가 전쟁으로 상처받은 독일인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1959년 전혜린이 번역해 고국에 소개되었고,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의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가 고국을 떠난 지 105년 만인 지난 17일, 그의 유해는 국내로 봉환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참고 문헌>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 웅진지식하우스, 2009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살림, 2016
이안 부르마, ‘0년: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글항아리, 2016
정규화‧박균, ‘이미륵 평전’, 범우, 2010
하랄트 얘너, ‘늑대의 시간’, 위즈덤하우스,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