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청룡영화상 시상식. 혼외자 스캔들이 터진 지 닷새만에 공식석상에 선 정우성이 최다관객상 시상자로 나서, 자신이 공동 주연을 맡은 영화 '서울의 봄' 감독에게 상을 주고, 동료 배우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받았다. /스포츠조선

배우 정우성이 큰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껄끄러운 혼외자(婚外子) 이슈를 시원하게 쏘아 올렸으니.

지난달 정씨는 16세 연하의 모델 문가비가 낳은 아기가 자신의 친자라고 밝혔다. 그러나 문씨와 결혼할 일은 없다면서,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다하겠다”고 했다.

아이에게 법적·금전적 지원은 하되 부모로 이뤄진 가정이란 울타리는 제공하지 않겠다는 그를 두고 여론은 양분됐다. “무책임하다” “문어발식 연애를 보니 평소 진보 이미지는 가식이었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한편 “책임진다는데 비난할 게 있느냐” “왜 결혼과 출산을 동일시하느냐” “미혼 배우의 사생활을 도덕적으로 단죄하지 말라”는 옹호론도 크다.

◆선진국형 자유연애의 시대?

유명인의 혼외자 추문에 대한 시선은 확실히 관대해졌다. 2013년 채동욱 검찰총장은 혼외자의 존재가 폭로되자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데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2015년 최태원 SK 회장이 혼외자를 공개하며 이혼 소송을 제기했을 때도 사회적 지탄이 컸다. 같은 해 아이돌 그룹 SS501의 미혼 멤버 김현중이 친자 확인 소송을 당했을 때 팬들은 ‘배신감’을 토로했고, 김씨는 ‘자숙’하며 친자 인지를 하고 양육비를 지급했다.

유명인의 혼외자 스캔들에 대한 시선은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저출산 문제가 겹치면서 크게 관대해지고 있다. 오른쪽부터 2015년 미혼임에도 혼외자 문제로 지탄받은 SS501 멤버 김현중, 2021년 혼외자 낙태 종용으로 피소된 배우 김용건, 2024년 혼외자를 뒤늦게 인정한 배우 정우성. /뉴시스 스포츠조선 뉴스1

그런데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지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2021년 70대 돌싱 배우 김용건이 39세 연하의 연인이 아들을 낳자 낙태를 종용하다 피소됐지만, 결국 호적에 올리고 요즘은 예능 프로에 나와 늦둥이 자랑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정우성이 청룡영화제에 나와 동료와 팬들의 박수를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닷새였다.

약간의 가치 혼란에 빠진 국민을 위해 대통령실은 분명히 했다. “여러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 한 명 한 명을 국가가 지원하고 보호하겠다는 일관된 철학이 있다. 모든 생명이 차별 없이 행복하게 자라도록 하겠다”고.

정부는 혼외자란 용어 자체가 ‘결손가정’이나 ‘편모슬하’처럼 차별과 낙인이 될 수 있다며 배제한다.

대세는 선진국처럼 가족·양육 환경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도 “부모 중심 지원 체계를 아이 중심으로 바꾼 비혼 출생 지원책을 만들겠다”(경북도청) “프랑스처럼 등록 동거혼(PACS·비혼 가구에 혼인 가정과 같은 지위를 제공)을 도입, 혼인 장벽을 낮춰 저출산을 극복하자”(국민의힘 나경원 의원)는 제안이 이어진다.

혼외 출산율은 서구 선진국에서 높은 편이다. 2020년 기준 OECD 평균은 42% 정도로,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의 10배에 달한다. /그래픽=양인성

◆혼외자 느는데 출산율은 제자리

학계에선 혼외자와 출산율의 상관관계에 주목한다. 결혼 부담 없이 자유롭게 만나 아이 낳는 게 사회에 도움 된다는 것이다. 세계적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교수는 “합계출산율 1.6명 넘는 국가 중 비혼 출산율이 30% 미만인 나라는 없다”고 한다.

2020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의 출생아 중 혼외자 비율은 평균 42%. 가톨릭이 국교인 남미나 개인 자유를 중시하는 유럽 국가는 이 비율이 60~70%에 달한다. 반면 집단주의 유교 문화가 강하고 교육열이 높은 동아시아 일본·한국·대만·싱가포르는 혼외 출산율이 극히 낮고, 동시에 세계 최악의 저출산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출생아 중 혼외자 비중이 급증하는데 저출생 문제는 나아지지 않는 현상이 벌어진다.

혼외자 비율은 1%대에 머무르다 2018년 처음 2%를 돌파했으며 2021년 2.9%, 2022년 3.9%, 2023년 4.7%로 매년 급증한다. 20명 중 1명, 1만여 명이 혼외자다.

한국의 출생아 중 혼외자 비율은 2018년 처음 2%대를 넘어서고, 매년 급증해 지난해 4.7%를 돌파했다. 여전히 OECD 선진국에 비해선 낮은 수치지만 유교 문화가 강한 한국에선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래픽=송윤혜

최근 합계출산율이 약간 반등했다지만, 혼외자와 출산율이 비례적으로 증가하는 ‘선진국형 모델’이 정착 중인지 판단하기는 이르다.

“결혼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는 많지만 방송인 사유리처럼 이성과 얽히지 않고 아이만 낳아 혼자 당당하게 키우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오히려 최근 혼외자 증가는 ‘무늬만 혼외자’를 둔 ‘무늬만 한부모’ 가정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착시 효과란 지적이 있다. 비혼 부모 복지 혜택이 갑자기 늘자, 소위 ‘부부 페널티’를 피해 위장 미혼을 택한다는 것이다. 결혼했다가 한 부모 혜택을 노리고 위장 이혼을 하기도 한다.

비혼 출산을 선택한 유명인들. (왼쪽부터)연인 기욤 카네와 결혼하지 않고 딸을 낳은 프랑스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 2020년 해외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을 낳은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 비혼 동거를 하며 아이를 낳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와 연인 그라임스(사진 왼쪽). /게티이미지코리아·놀 출판사·X(옛 트위터)

2021년쯤 혼외자 증가와 함께 급증한 한부모 가정은 현재 총 35만 가구. 이 중 정부·지자체 지원을 받는 저소득층은 19만8000가구다. 그때는 문재인 정부 말기, 한 부모에 대한 현금 지원과 주택 청약 혜택 등이 대폭 늘어난 시기다. 막대한 돈이 풀리며 부동산 값이 폭등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 집값 상승과 한부모·혼외자 증가는 뚜렷한 관련성이 있다”고 한다.

◆특공·양육비 노린 ‘무늬만 한부모’

한부모 가정 혜택이 뭐기에 그럴까. 부 또는 모가 미성년자를 혼자 부양하는 가정의 중위소득이 63%(2인 가구 기준 232만원) 이하면 각종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자녀 1인당 매달 21만원의 아동양육비가 나오고, 미혼모나 34세 이하 청년이 5세 이하 유아를 키우면 좀 더 받는다. 학용품비 등으로 아이당 월 4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각종 교육·문화 시설을 무료·우선 이용할 수 있고, 건강보험료부터 전기·수도·가스료, 교통·통신비 할인 혜택도 크다. 초등 돌봄 교실 선발부터 대입 사회적 배려 대상자 특례까지 교육 지원도 촘촘하다.

출산 가구 지원 방안을 위한 새로운 청약제도가 시행된 지난 3월 서울 중구 남산에서 바라본 도심 아파트 모습. 부동산값이 폭등하는데 복지 지원이 갑자기 늘자, 한부모 가정 등 취약 가정을 위한 주택 특공을 노리고 위장 미혼 혹은 위장 비혼으로 살며 자녀를 혼외자로 만드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뉴시스

가장 큰 건 주거 지원이다. 한부모 가정은 임대주택 특별공급 대상자다. 부부 중 1명만 신청할 수 있는 일반 가정 대비 청약 기회가 더 많고 대출 조건도 훨씬 유리하다. 어려운 여건에서 아이를 잘 키우려는 싱글 부모에겐 단비 같은 정책이다.

그러나 부동산 업계엔 “청약을 노리고 부부가 일부러 혼인신고 안 하거나 위장 이혼 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말이 파다하다.

사실혼 커플이 이 정책을 기막히게 이용해 2주택자가 되기도 한다. 여성이 임신 중 먼저 ‘신혼부부 특공’에서 한부모 가산점을 받아 공공주택 분양에 당첨되고, 자녀 출산 후엔 남성이 ‘생애 최초 특공’에 또 한부모 가족으로 신청해 분양을 받아 적발됐다.

혼인신고를 미루고 ‘위장 미혼'으로 사는 젊은 부부들은 “지금 부동산 시장에선 혼인신고를 하면 도저히 집을 살 방법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혼인신고를 하면 연말정산시 배우자 공제를 받는 등 이점도 있지만, 부동산으로 얻는 이득만은 못하다는 것이다. /조선일보DB

이런 사례는 파도파도 끝이 없다. 30대 사실혼 관계 남녀가 아이를 낳고 4년간 아동양육비와 난방연료비, 기초주거급여 등 4000만원 상당을 부정 수급한 일이 드러나 전액 환수와 벌금 600만원이 선고됐다.

한 직장인 커뮤니티엔 ‘결혼 2년 차인데 임신한 아내가 혼인신고를 거부한다’는 고민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의 아내는 “미혼모는 어린이집 입소도 우선순위고 육아휴직 급여, 연말정산 공제까지 유리하다”며 “친언니와 친구들 다 미혼모 지원금을 받는데 나라고 왜 못하냐”고 했다고 한다.

◆세금 도둑질에 납세자는 분통

한부모 지원금 부정 수급자는 2021년 969건으로 최고치를 찍었다가, 현 정부에서 신고 포상금을 올리고 단속을 강화하자 다소 줄었다. 그러나 결혼·재혼을 하거나 소득이 늘어도 자진 신고에 맡기기 때문에 부정 수급을 즉각 걸러내기 어렵다고 한다.

한부모 가정 지원금 부정 수급이 적발된 건수는 문재인 정부 때 급격히 늘었다. 한부모 지원을 확대하고, 부동산 값이 폭등하며 빈부 격차가 커진 2021년께 절정에 달했다. 현 정부에서 단속을 강화하며 건수가 줄어들곤 있지만, 여전히 복지 예산이 줄줄 샌다는 지적이다. /그래픽=송윤혜

‘위장 비혼’에 세트로 따라오는 수법은 소득과 재산을 감추는 것. 월급을 현금으로 받거나 다른 사람 통장으로 넣는다.

보유 차량도 경차나 오래된 중형차까지만 인정되니, 외제차나 신형 전기차를 친척 명의로 사서 굴린다. 이들은 세금을 훔치는 불법 행위를 ‘재테크 꿀팁’처럼 공유하고, “못 타 먹는 게 바보”라고 자랑한다.

경기도의 40대 남성 이모씨는 “고교 동기가 결혼식 올리고 아이 낳고 월 400여만 원을 벌면서도 한부모·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을 받고 서울 시내 임대아파트를 특공으로 살길래 신고했다”며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해 세금 내고 누구는 나랏돈으로 각종 혜택 또박또박 받는 게 분통 터졌다”고 했다.

직장인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올라오는 위장 한부모 가정 관련 폭로 글들. 위는 한 방송 프로에 나온 가정에 대한 의심 글이고, 아래는 아내의 거부로 혼인신고를 못하고 있다는 직장인 하소연이다. /블라인드

되레 신고자가 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정부가 예산 용처를 늘리면 업적이 되지만, 일일이 검증해 다시 뺏는 건 꺼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충남 아산의 배모씨는 “지인이 아이 둘 낳고 부부가 살면서 한부모 행세를 하기에 증거 사진까지 찍어 신고했는데, ‘우린 공무원이지 형사가 아니다, 무리한 뒷조사는 못 한다’고 하더라”고 했다.

위장 한부모 가정이나 혼외자 증가는 ‘어떤 가정이든 포용하자’는 성숙한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기 전 제도가 설레발친 결과일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조급증과 도덕적 해이가 만나 온전할 수 있는 가정을 와해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부모와 도움이 절실한 아이들을 역차별할 수도 있다. 눈 부릅뜨고 지켜볼 건 정우성만이 아니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