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날 가스라이팅하는 거야?” “가스라이팅 때문에 이혼하고 싶어요.” “△△당은 국민을 XX 이념으로 가스라이팅하지 말라!”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지 말라는 러시아의 협박은 한국에 대한 가스라이팅으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심리적 지배)이 흔해졌다. 일상 대화부터 법원 판결문, 정치 유튜브, 국가 간 외교 논평에까지 가스라이팅이 등장한다. 어려운 심리학 용어가 이렇게 빨리 우리 일상에 자리 잡은 경우도 드물다.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한 뒤 통제·지배하는 고도의 정신적 학대 행위를 말한다. 어떤 개념이 조명받는 건 대중의 공감대를 건드렸다는 뜻. 우리는 왜 이토록 가스라이팅에 예민해진 걸까.
정서적 폭력에 예민해진 시대
가스라이팅은 1938년 영국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했다. 범죄자 남편이 멀쩡한 아내를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정신병자로 몰아가는 내용이다.
남편이 윗집 부인을 살해하고 보석을 훔치려 가스등을 켤 때마다 자기 집 가스등은 희미해진다. 아내가 “어둡다”고 하면 “당신이 잘못 본 것” “엉뚱한 소리 말라”고 몰아세운다. 아내는 조작된 현실 속에서 자신을 믿지 못하고 집 안에 갇혀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정신분석가 로빈 스턴 미국 예일대 교수는 이에 착안해 2007년 폭력적 심리 조작을 ‘가스등 효과’ ‘가스라이팅’이라 명명한 책을 냈다. 심리학 용어로 정립되지 않았는데도 “내가 당한 게 혹시…?”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이끌어냈다.
코로나 팬데믹 때 정신 건강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면서, 가스라이팅은 2022년 메리엄 웹스터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에 올랐다.
국내에서 이 말은 2021년 배우 서예지와 김정현 커플이 가스라이팅 관계가 아니냐는 논란으로 회자하기 시작했다. 서씨는 김씨가 출연하는 로맨스 드라마 대본을 수정하게 하고, “내가 행복해야 너도 행복한 것”이라며 조종하는 말투로 대했다고 한다.
2021년 6월부턴 검찰 구형과 법원 판결문에도 ‘가스라이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 사이비 종교 관련 범죄에서다.
최근 한 달 새 미성년 애인에게 ‘주체적 생각 않기’ ‘다른 남자 쳐다보지 않기’ 같은 규칙을 강요하고 폭행한 20대 남성이 가스라이팅으로 징역형을 받았고, 지적장애인을 가스라이팅해 원한 관계의 인물을 살인하도록 교사한 모텔 사장에게 징역 40년이 구형됐으며, 동거하는 고교생에게 개 배설물을 먹이고 자해하도록 가스라이팅한 20대 무속인에게 징역 7년이 선고됐다. 배우 이선균을 협박해 죽음에 이르게 한 유흥업소 실장은 이달 공판에서 “나도 다른 피고에게 가스라이팅당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86년 전 연극의 설정도 그랬지만, 가스라이팅은 남의 눈에 안 띄는 은폐된 공간에서 장기간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부부·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법원 판결문 통계에선 가스라이팅이 부부·연인 간 범죄에 언급된 경우가 40%로 가장 많다. 그다음이 지인·친구(10%), 가족, 선후배·사제 순이다.
이혼소송에서도 ‘가스라이팅’이 급부상, 가정 폭력의 일종으로 인정되는 추세다. 변호사들에겐 “가스라이팅이 이혼 사유가 되느냐, 위자료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는 문의가 급증한다고 한다. 부부간 의견 충돌만 있어도 서로 “가스라이팅당했다”고 주장할 정도다.
가스라이팅이 진짜 무서운 이유
그러나 가스라이팅은 단순한 비판이나 불편한 요구, 성격 차이와는 다르다. 지속적인 의도된 거짓말과 강압·통제가 있어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평등한 성인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어서, 피해자가 즉각 검증하고 문제 제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법정에선 피해자가 인지하고 저항하면 가스라이팅으로 보지 않기도 한다. 2022년 ‘계곡 살인’ 사건에서 검찰이 이은해의 가스라이팅에 의한 직접 살인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씨의 남편이 “네가 날 밀었잖아” “다이빙하기 싫다” “우리 그냥 헤어질까” 같은 ‘주체적 의사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가스라이팅에 의한 간접 살인’만 인정했다.
가스라이팅 가해자, 즉 가스라이터(gaslighter)의 전형적 화법은 이렇다. 사소한 일도 개입해 대신 결정하고, “다 널 위해 하는 일” “네가 XXX할 자격이 있느냐” “나니까 참고 너와 살아주는 것”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라며 존재 가치를 짓밟는다.
자신이 명백히 잘못하고도 “네가 잘못 기억하는 것”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부정하거나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확 죽어버리겠다”는 식으로 대화를 봉쇄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최대 과제가 된다. 자신의 느낌과 판단, 사회적 관계까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고 자존감이 떨어져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뭐가 문제인지 알고 싶지만, 과거 사이가 좋았던 정상적인 지인들과는 단절된 상태라 도움받기도 힘들다. 가스라이터에 대한 복종이 심화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가스라이팅 사례를 보면 “어떻게 그런 뻔한 계략에 멀쩡한 사람이 속아 넘어가나?” 황당하다. 이유는 다른 폭력·사기와 달리 가스라이팅이 매우 가깝고 전적인 신뢰 관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친밀했던 부모·자식이나 부부 관계가 병적으로 바뀌는 경우, 남이 알아차리기는커녕 피해자 본인조차 학대 인지를 수십 년간 못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사회적 지위나 권력, 재산, 학력, 성별과는 무관하게 일어난다. 지배당하는 사람의 심리적 취약성, 그걸 파고들어 이용하는 이의 사악한 능력의 결합에 달렸다. 로빈 스턴은 가스라이팅을 ‘상대를 조종하려는 가해자와 그를 이상화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피해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의 병리 현상’으로 규정했다.
사랑이란 이름의 폭력, 탈출법은
가스라이팅과 세트로 거론되는 병증이 있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자기애성 성격장애자). 나르시시스트는 단순한 이기주의자를 넘어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타인을 먹잇감 삼는 사람들인데, 애용하는 수법이 가스라이팅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언뜻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잘 베풀고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등 사람 사로잡는 법을 잘 안다. 나르시시스트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일 것 같지만, 연약한 이미지로 위장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마음을 얻은 뒤 상대를 조종해 편익을 취하고, 자신만 떠받들게 하며, 남의 욕구나 감정은 무시하고, 원망과 협박을 쏟아내고, 피해자와 그 주변을 이간질해 정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다 곤경에 처하면 피해자 행세를 하며 잘못을 덮어씌운다. 상대가 멀어진다 싶으면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가 반성하는 척하거나 다시 애정 공세를 퍼붓는다. 이 과정이 무한 반복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가스라이팅당하고 있는지 판별하는 법. △어떤 이에게 늘 죄책감이 들고 말조심을 해야 한다 △그 사람 관심사로만 화제가 흘러간다 △관계가 나빠지면 어느 한쪽만 사과하게 된다 △남들의 지적을 그에게 사실대로 전하기 힘들다 △그 사람 의도와 행동을 남들에게 대신 변명해줘야 한다면, 의심해 봐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가해자와 관계를 끊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조성우 정신과 전문의는 “나르시시스트는 정신과 질환 중 거의 유일하게 치료가 안 된다. ‘잘해주면 나아지겠지’란 생각은 착각이다. 탈출·손절밖에 답이 없다”고 했다.
김지은 범죄심리사도 “가스라이터는 자기 인식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되기 어렵다”며 “품위 있게 헤어지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고 한다.
유력 정치인들을 두고 ‘배우자에게 가스라이팅당한 피해자’라거나, 본인 범죄 혐의를 감추려 남의 잘못을 들추는 ‘대국민 가스라이터’가 아니냐는 말이 돈다.
그런데 정신의학계엔 골드워터 룰(Goldwater Rule)이란 게 있다. 정신과 의사가 직접 진단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정신과적 전문 의견을 밝히는 건 비윤리적이라는 원칙이다. 권력자의 정신 문제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있어도 진단받기 어렵고 정치적·법적 책임을 지울 때 참작되지도 않는다.
전문가들은 “가스라이팅 피해자는 가해자와 절연한 뒤에도 자존감이 낮아져 있어,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회복할 치유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대리 외상 증후군(간접 경험에 따른 트라우마)을 겪는 국민은 각자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