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에 대한 추억이나 호기심이 있다면 경기 안산시 대부도로 갈 일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시화방조제를 건널 때 왼쪽으로 시화호가, 오른쪽으로 서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시화호 안에는 상상 속 거인처럼 송전탑이 줄지어 서 있다. 썰물 때라 바다는 멀리 달아나 있고, 그 틈에 갯벌에서 뭔가를 줍는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도 초입 방아머리에서는 오늘도 힘차게 풍력발전기가 돌아간다. 구부러진 길 저편에 노란색과 하늘색 우크라이나 국기를 닮은 대형 천막 극장이 나타난다. 100년을 며칠 앞둔 동춘서커스다.
지난 1일 오전 10시 20분. ‘since 1925(1925년부터) 명불허전’을 홍보하는 천막 극장 앞은 왁자지껄했다. 일요일 첫 공연을 40분 앞두고 아이 손을 잡고 온 가족 관객 30~40명이 매표소 앞에 줄서 있었다. 애견도 같이 들어갈 수 있었다. 티켓에 ‘2030년까지 대부도에서 상설 공연’이라고 적혀 있었다. 동춘서커스 박세환(80) 단장은 “겨울은 비수기지만 주말에는 하루 3회 공연에 모두 1000명쯤 관람한다”며 “존폐 위기를 여러 번 겪고 살아남아 새해에 100년을 맞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전성기는 1960년대
이날 오전 11시 공연이 시작됐다. 오프닝 무대는 역시 ‘쌍철봉’. 긴 수직 철봉 두 개에 남성 단원 8명이 달라붙었다. 8m 높이 기둥에서 몸의 탄력만으로 상하 이동했다. 팔심 또는 가랑이 힘으로 수평으로 버티기도 했다. 떨어지는 듯하다가 멈출 때는 아찔했다.
다음 무대는 ‘공중 실크’. 여성 곡예사가 지상 8m에 거꾸로 매달렸다. 태양의 서커스 한 장면과 겹쳐졌다. 위태로우면서 서정적인 동작이 조명, 음악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몸의 무늬를 찍어냈다. 배경음악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I Have Nothing’이 흘러나왔고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요~”가 귓바퀴에 계속 맴돌았다. 곡예사는 몸을 감은 천을 휘리릭 풀면서 추락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착지.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서커스 발레’가 이어졌다.
동춘서커스의 역사는 한국 서커스 역사와 같다. 1925년 전남 목포에서 동춘 박동수가 조선인 30명을 모아 동춘연예단을 창단한 게 출발점. 소달구지에 장비를 싣고 조선과 만주를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마을에 도착해 나팔을 불고 큰북을 치면 꼬마들이 몰려들었다. 마술부터 공중 곡예, 동물 쇼, 신파극, 국악, 캉캉에 코미디까지 이어 달린 종합 선물 세트였다. 천막 극장에서 3시간이나마 현실의 시름을 잊고 웃을 수 있었다.
서커스라는 말은 라틴어 ‘키르쿠스(circus·바퀴)’에서 나왔다. 물리적 속도와 조마조마한 감정, 멈추지 않는 유랑이 묻어난다. 국내 서커스단은 한때 20곳이 넘을 만큼 호황을 누렸지만 1960년대에 TV가 보급되고 1972년 일일 드라마 ‘여로’가 히트하자 관객이 급감했다. ‘여로’ 방영 후 다섯 달 만에 전국에서 공연 중이던 곡예단 15곳이 망했다.
TV 맛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쇼를 찾지 않았다. 동춘서커스 역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전 국민을 상대로 쇼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100년이라는 나이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IMF 외환 위기와 신종 플루, 코로나 사태를 모두 지나왔다는 뜻이다. 이 천막 극장은 백세 노인의 인생처럼 희로애락을 품고 있다. 전성기는 1960년대였다. 단원이 270명에 달했다. 허장강,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남철, 남성남, 장항선, 이봉조, 정훈희, 곽규석 등이 거쳐간 동춘서커스는 연기, 코미디, 노래를 연습하며 날마다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무대였다.
코끼리 제니의 죽음
동물은 등장하지 않은 지 오래다. 1960~70년대 동춘에서 가장 ‘덩치 큰 배우’는 인도코끼리 제니(암컷)였다. 1960년대 초 국내에 코끼리는 창경원에 두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물구나무서고, 코로 하모니카를 불고, 커다란 시멘트공 위에 올라가 춤추는 제니를 보며 열광했다. 그 코끼리를 앞세우고 장터를 한 바퀴 돌면 아이들이 절로 따라붙었다. 홍보가 필요 없을 정도로.
1980년 2월 농약 묻은 지푸라기를 먹고 앓던 이 복덩이 제니는 숙직자가 불을 꺼뜨리는 통에 동사하고 말았다. 박세환 단장은 이렇게 술회했다. “TV와 영화에 밀려 서커스도 불황에 빠지던 때였다. 휘청거리던 동춘은 제니의 죽음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그는 땅에 묻은 제니를 나중에 꺼내 박제로 만들었다. 동춘서커스의 상징과 같았기 때문이다. 박제한 제니는 천막 극장과 함께 한동안 전국을 유랑했다.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코끼리와 나’를 공연할 때 로비에 전시된 제니를 만났다. 그 연극은 1411년 일본이 조선 왕실에 예물로 바친 ‘흑산(黑山)’이 주인공. 조선왕조실록은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는데 하루에 콩을 4~5말씩 먹는다’고 전한다. 1412년 한 관리가 비웃으며 침을 뱉었는데, 성난 코끼리가 코로 말아 땅에 쳐 죽이는 사건이 터졌다. 코끼리는 섬으로 유배됐다. ‘코끼리와 나’는 한국 최초의 코끼리 흑산과 서커스로 사랑받은 제니의 만남이라 화제가 됐다.
제니의 몸집은 길이 3.3m, 높이 2m였다. 박제할 때 머리 뼈와 다리 뼈는 그대로 둔 채 내장을 파냈고, 솜으로 속을 채웠다고. 불행히도 상아는 도둑맞았다. 긴 코는 안에 철사를 넣어 형태를 바꿀 수 있었다. 가죽에 난 상처를 헝겊으로 덧씌우거나 철사로 꿰맨 흔적이 역력했다. 당시 박세환 단장은 “공연하는 곳마다 마스코트처럼 끌고 다녔는데, 여기저기 망가지고 운송비 부담도 커져 창고에 넣어둔 지 4년”이라고 했다.
바퀴와 저글링
요즘 동춘서커스는 90분 동안 16가지 묘기를 보여준다. 관객을 긴장시킨 다음엔 이완이 필요하다. 그럴 땐 저글링이 최고다. ‘모자 저글링’ 순서가 돌아왔다. 저마다 모자를 3개씩 들고 나온 단원 5명이 던지고 받으며 워밍업을 한다.
저글링에는 일종의 구조가 있다. 모자가 아니어도 좋다.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기술을 경험하게 하고 또 기대하게 만든다. 그 후에 변주가 시작된다.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던지고 받고, 조합을 바꿔 가면서 던지고 받고, 텀블링을 하며 던지고 받고, 2층 높이로 올라타 던지고 받고…. 나중에는 10명이 피라미드처럼 탑을 쌓은 채로 저글링을 한다. 객석에 유쾌한 웃음이 번졌다.
공 묘기가 이어진다. 농구공처럼 생긴 공 25개를 이용해 여성 단원 4명이 여러 가지 묘기를 보여준다. 누운 채로 발에 공을 올려 재주를 부린다는 게 차이점이다. 공을 점점 늘려간다. 모자가 손으로 하는 저글링이었다면 이것은 발로 하는 저글링이다. 기본적으로 잘 던지고 잘 받으며 바퀴처럼 멈추지 말고 계속 순환해야 한다. 나중에는 발로 농구 골대에 던져 골인.
그 순간 2009년 신종 플루 때 서울 청량리 수산시장 옆 천막 극장에서 본 동춘서커스가 떠올랐다. 장돌뱅이처럼 전국을 떠돌다 짐을 풀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다. 가설 무대에서는 15세쯤 된 곡예사들이 양손으로 접시를 3~4개씩 돌리고 있었다. 얼굴은 무표정에 가까웠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는 400개가 넘었지만 관객은 9명뿐이었다. 커튼콜 땐 “어디서 무엇 하다 이제 왔나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라이라이야 어서 오세요/ 당신의 꽃이 될래요~”(장윤정 노래 ‘꽃’)가 서글프게 흘러나왔다.
2011년 대부도
동춘서커스는 국내 최장수 공연 예술 단체. 신종 플루로 지역 축제가 된서리를 맞고 관객이 급감하며 운영자금이 바닥났다. 궁지에 몰린 박세환 단장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부고장을 올렸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추억이 부활하며 관객이 밀려들었다. 그 무렵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됐다. 단원 15명이 노동부에서 3년간 지원금을 받았다.
안산시 대부도에 짐을 푼 2011년부터는 안정 궤도에 올라섰다. 당시 박세환 단장은 “평일에 하루 300~400명, 토·일요일엔 1000여 명씩 손님이 온다”며 “포기할 핑계만 찾고 있었는데 다시 뛸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갈증을 느꼈는지 깡통 주스를 단숨에 들이켰다. 7000만원을 투자해 새로 샀다는 천막 극장 안으로 관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여기 몸담은 지 50년인데 2009~2010년만 한 위기는 없었다. 하루 공칠 수는 없으니 열 사람 놓고도 공연을 올렸다. 김연아가 아무것도 안 하고 석 달 놀면 몸이 굳는다. 우리는 레미콘처럼 계속 돌려야 생존할 수 있다.”
공사장 잡역부나 야간 업소로 흩어졌던 단원들이 복귀했다. 모두 45명(25명은 중국인). 20명으로 오그라들었던 2009년에 비하면 2년 만에 상황이 나아졌지만 동춘이 보유한 35가지 묘기 중 고전적 의미의 공중 그네는 사라졌다. TV에 출연하기도 한 곡예사 김꽃님이 ‘사회’로 나간 뒤 일이다.
2003년에 만난 꽃님이는 “사회에서 화장과 네일 아트를 배우다 박수 소리가 그리워 돌아왔지만 얼마나 오래 버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꽃님이 방에는 초승달과 별을 닮은 스티커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잠을 자려고 불 끄고 누우면 지붕이 없는 탁 트인 곳에 누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00년 넘어도 ‘생사륜’
공중 곡예사들은 안전 장치 없이 허공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오랜 연습과 약속을 바탕으로 실수하지 않도록 준비하지만 그날 몸 상태나 호흡, 객석 분위기 등에 따라 추락할 수도 있다.
이날 본 동춘서커스의 클라이막스는 ‘생사륜’이었다. 생(生)과 사(死)의 수레바퀴라는 뜻. 바닥에 안전 매트가 깔렸다. 무대를 가득 채운 커다란 두 바퀴가 돌기 시작했고 두 곡예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바퀴 안에서 구르기부터 바퀴 밖을 달리며 재주를 넘기까지 아슬아슬했다. 힘과 속도 감각, 균형과 호흡이 필요한 묘기였다.
어른도 마음속엔 아이가 산다. 세상만사에 지쳐 시큰둥한 성인 관객들은 마술에 걸린 듯 탄성을 토하며 즐겼다. 천막 극장까지 갈 때는 혹시 춥지 않은지, 좌석은 불편하지 않은지 시시한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가족 여행을 왔다가 들렀다는 김인구(48·경기 화성)씨는 “추억에다 실력까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고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이날 무대는 ‘피에로 마술’ ‘원 핸드 밸런싱’ ‘공중 로맨스’ ‘상 돌리기’ 등을 지나 ‘각종 체조’로 닫혔다. 커튼콜과 함께 이찬원 노래 ‘아침의 나라에서’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다정한 친구처럼/ 모두가 다정한 형제처럼/ 우리의 가슴이 열리는 곳/ 오 서울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