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저기 언덕 즈음에 나무를 심자. 결혼식을 하는 대신, 그렇게 하자. 이 거실에 서서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 열매 맺는 걸 함께 보는 거야.”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변두리 어느 화원에 들러 묘목 세 그루를 골랐다. 매실, 앵두, 살구.

“이건 뭐 손바닥 몇 대 때리면 부러질 것 같은데요? 이걸 심으면 나무가 돼서 열매를 맺는다고요? 정말이요?” 가느다란 회초리 같은 막대기 끝에 실핏줄 같은 뿌리가 안간힘을 다해 붙어 있는 묘목들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나무가 될지 말지는 이제 하늘이 알죠. 비를 내리고, 햇볕을 주는 건, 인간의 일이 아니니까요.” 주인아저씨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그는 머쓱해했다. 하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 말을 오랫동안 떠올렸다. ‘나무가 될지 말지는 이제 하늘이 알죠.’ 그때, 우리의 이별도 하늘만 아는 일이었다.

그 연약한 묘목들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자라났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창가에 서서, 멀리서도 눈에 띌 수 있도록 빨강 노랑 초록 이름표를 달아 놓은 그 묘목들을 눈으로 찾아 인사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똑같아 보였지만, 내일은 달랐다. 며칠이 지나 보면 어느새 가느다란 몸통에서 팔이 비쭉 하나 솟아나고, 또 하나 비쭉 솟아나더니, 갑자기 연두색 새순들이 와와 비명을 내지르며 팝콘처럼 터져 매달렸다. 여름이 시작된 어느 날 아침, 리본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밤새 비를 맞은 나무들은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온몸의 잎사귀를 있는 힘껏 펼쳐내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그와 크게 싸우기 며칠 전, 묘목들의 안부가 궁금했던 우리는 양지바른 공터를 찾느라 등산로에서도 한참 벗어난 비탈길 어딘가에 심어 둔 녀석들을 찾아 나섰다. 억센 넝쿨들이 맨 다리에 닿아 벌겋게 부풀어 올랐지만 그래도 꼭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묘목을 심은 장소에 도착한 것 같은데, 도통 찾을 수가 없어 초조해지고 있을 때, 잡초 더미 사이로 노란색 리본 끝이 살랑거리며 손짓을 한다. 무성한 나뭇잎들을 헤치고 다가가니 어느새 허리께만치 자란 묘목 세 그루가 거기에 있었다. 서로에게 힘껏 팔을 뻗어 닿으려는 듯 가지를 쳐 올라가는 생명력, 저 생명력. 하지만 리본에 적어 둔 매실, 앵두, 살구, 그의 손 글씨들은 희미하게 사라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선명했던 매직 글씨가 서서히 옅어지는 것처럼, 언제부턴가 말이 없어져가는 우리의 미래가 불안했던 나는, 그 묘목들을 보고 애써 위안을 얻으며 산을 내려왔다. 괜찮을 거야, 우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집을 떠났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했나. 기뻤고, 슬펐다. 원했던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슬펐고, 원했던 곳에서 일하게 되어 기뻤다. 선택의 결과가 숫자로, 또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뉘어서 통보를 받는다는 게 얼마나 간편한 일인가. 답은 명쾌했으니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나니 늘 두려웠다. 난 합격일까, 불합격일까. 우린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사랑하고, 행복할까.

창밖으로 야트막한 야산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장난스러운 오솔길이 내다보이는 그 집을 나는 사랑했다. 등산객의 머리 꼭대기가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들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걸 오래도록 구경하곤 했다. 초여름 오후,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내 발끝으로 숲의 초록을 묻혀 온 바람이 지나가며 간질이고, 가을이면 나무 끝에서 떨구어진 잎사귀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실 창에 붙어 흘낏 구경하더니, 별 볼일 없다는 듯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느 날에는 똑똑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니 꼬리 끝이 노랗고 부리가 빨간 새 한 마리가 창틀에 앉아 노크를 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겨울이면. 하지만 나는 겨울의 풍경을 모른다. 창을 가려버린 두꺼운 잿빛 커튼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그 겨울을 보냈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잖아.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잖아. 비단 사람의 인연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이 불교의 가르침을 가까스로 이해하기 시작한 건 마흔이 넘어서일까. 한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한 세상을 만나는 것이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는 건 함께 만들었던 세상이 떠나가는 것. 친구도 연인도 내 세상의 일부를 가졌던 누군가와의 이별이 여전히 아프지만 그래도 애쓰려 하지 않으려 해. 때가 되면, 다시 만날 사람이라면, 마주하고 웃을 시간이 다시 오겠지. 시절인연처럼. 그때 다시 반갑게 인사할 거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