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은 책 속의 풍경과 책 밖의 풍경이 겹쳐질 때다. 이를테면 ‘눈 내리는 날’이란 글을 읽다가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던가. 오늘이 그랬다. 나한테는 이런 일이 흔한데 나는 일종의 확증 편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럴 때면 이 세계가 지금 이 순간 나를 위해 이런 걸 준비해준 건가라는 아찔함과 어리둥절함이 교차하며 책 속의 풍경이 나를 감싸안는다.

눈이 오면 전차도 자동차도 없는 메이지 시대(1868~1912)의 거리를 떠올린다는 나가이 가후의 글이었다. 그는 1879년에 태어났고, 그 글은 1946년 무렵에 쓰였다. 눈 오는 날 죽마고우와 함께 고토토이교를 건너 적막한 스미다 강 근처 술집에 가는 내용이다. 나도 얼마 전에 스미다 강 근처의 술집에 갔다가 다리를 건넌 적이 있었다. ‘혹시 그 다리가 그 다리인가?’라며 구글맵을 찾아보았더니 내가 건넌 다리는 아즈마교로, 고토토이교 바로 옆에 있는 다리였다.

지난달의 나는 낮술도 아니고 오전 술을 하고서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스미다 강을 건너야지’라며 잠시 다리를 건너 아사히 본사 쪽으로 걸어갔다가 황급히 되돌아와 아사쿠사역으로 갔다. ‘여기까지 왔으면 그래도 스미다 강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스미다 강’이라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인데 그걸 쓴 사람이 바로 나가이 가후다. 이러니 제가 좀 찌르르하지 않았겠습니까?

일본 최초의 바 '가미야'의 올드 덴키브랑(왼쪽)과 뉴 덴키브랑 /한은형 제공

그리고 오전 술을 마신 곳은 메이지 시대에 생긴 일본 최초의 바였다. ‘since 1880′이라며 창업 연도를 간판 아래 상당히 멋들어진 이탤릭체로 써놓고는 1880년의 분위기를 팔고 있는 바. 메이지 시대의 바가 있다며, 도쿄에 가면 가보라고 언젠가 H가 이야기한 게 생각나 갈 수 있었다. 그 바의 이름은 ‘가미야’다. 아사쿠사역에서 내려서 사람들이 걷는 방향 쪽으로 조금만 걷다 보면 인력거꾼들이 모여 있는 데가 나오는데 바로 그 앞이 가미야다.

10시 50분, 술집이 열기 10분 전에 술집 앞에 도착했다. 인력거꾼이 인력거를 타지 않겠느냐는 눈빛을 보냈으나 거절하고 가미야 바의 쇼윈도를 보고 또 보았다. 바에서 파는 음식과 술 일체를 정교한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는데 이것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역(助役)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무엇인가? 바로 전기였다. 깜빡거리는 전기가 쇼윈도를 타고 찌르르하게 계속 흘렀다. 전기가 신문물 중에서도 최첨단이었던 그 시절의 감격 같은 걸 형상화한 절묘한 연출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0시 55분, 종업원이 나오더니 인사를 하고 셔터를 쥐구멍 정도만큼만 올렸다. 2분 후 종업원이 다시 나오더니 셔터를 무릎쯤 높이로 올려 오픈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별거 아닐 수 있는 이 한 뼘의 귀여움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나 말고 기다리는 사람은 두 명 더 있었는데, 둘 다 노년의 남자로 문고판을 읽으며 기다리는 한 사람이 인상적이었다. 드디어 입장.

내가 앉은 자리는 8인석쯤 되는 공용 테이블로, 테이블 위에 투명한 칸막이를 해서 실제로는 두 좌석에 혼자 앉은 느낌이 드는, 독립적이면서 개방감이 드는 쾌적한 자리였다. 같이 있되 혼자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자리랄까. 그리고 미스터 문고판은 나의 대각선 자리에 착석했다.

내 앞에는 따스한 호박색 술 두 잔이 놓였다. 올드 덴키브랑(40도)과 뉴 덴키브랑(30도). 덴키브랑이란 ‘전기’와 ‘브랜디’의 일본어인 ‘덴키’와 ‘브랑’을 결합해 만든 가미야의 특제 칵테일이다. ‘첨단 오브 첨단’이라는 뜻의 접두사로, 또 도수가 높은 술이 주는 찌르르함을 상징하는 비유로 전기를 붙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미스터 문고판은 문고판을 읽으며 나처럼 올드와 뉴 덴키브랑을 번갈아 마시고 있었고, 나는 참으로 온화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책에 삶을 녹이기, 혹은 삶에 술을 녹이기, 어느 게 용매이고 어느 게 용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들은 참으로 부드럽다고. 하지만 ‘덴키’가 흐르는 입속은 찌르르했고, 나는 찌르르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그 오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