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의 어느 밤. 우연히 성냥갑을 갖고 있던 소녀는 손이라도 녹이려고 첫 번째 성냥불을 켰다. 트러플(송로버섯)이 들어갔다는 특급 호텔 크리스마스 케이크의 환영이 나타났다.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오마카세를 즐기는 사람들과 값비싼 트리가. 성냥불이 꺼지자 풍경도 곧 사라졌다. 소녀는 중얼거렸다. “돈은 없지만 크리스마스 기분은 내고 싶어.”
고물가에 크리스마스 소비도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누구는 수십만원짜리 케이크를 구하지 못해 안달인데 누구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값비싼 장식품이 달린 트리를 주문 제작하는가 하면 동대문을 돌면서 1000원대 장식품을 찾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크리스마스 소비에도 양극화 현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케이크 40만원 vs 9980원
40만원. 한 호텔이 내놓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더 테이스트 오브 럭셔리’ 가격이다(아, 당황스럽다). 공개된 올해 호텔 케이크 중 가장 비싸다. 흑색 파우더가 뿌려진 외관이 고오~급스러운 이 케이크는 지난해 같은 이름으로 30만원에 출시됐는데, 1년 새 10만원(33.3%) 올랐다. 최고급 트러플과 프랑스 디저트 와인 ‘샤토 디켐’이 들어갔단다. 올해는 트러플을 지난해보다 25% 늘렸다고. 또 다른 호텔의 ‘위시 휠’ 케이크는 35만원이다. 대관람차 장식이 실제로 회전한다. 이런 케이크를 줄 서서 산다.
그런가 하면 똑같이 줄을 서는데 가격은 소박한 케이크가 있다. 대형 유통 업체가 올해로 3년째 출시하고 있는 9000원대 가성비 케이크. 올해 출시된 ‘몰티즈 앤 리트리버’는 9980원이다. 지난해 기준 초저가 케이크 시리즈의 누적 판매량은 4만개를 돌파했다. 한 커피 프랜차이즈가 내놓은 1만원대 ‘노티드 메가 스마일 우유 케이크’는 올해 예약 2주 만에 목표 판매량의 1.5배를 초과 달성하기도 했다.
◇트리 10만 9000원 vs 1만원
자, 가성비 케이크를 선호하는 이들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들여다보자. 크리스마스에는 트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하나에 1만~2만원인 오너먼트 대신 1000원대의 값싼 장식을 원한다. 업계 관계자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내구성보다 가성비를 중시하는 소비 심리가 최근 더 뚜렷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달려가는 곳은 다이소. 최근 다이소 크리스마스 관련 제품은 ‘품절 대란’이 날 정도로 인기다. 캐럴에 맞춰 춤을 추는 5000원짜리 산타 인형인 ‘노래하는 산타 장식’을 사기 위해 인근 다이소 5곳을 도는가 하면, 품절 상품 구매를 위해 재입고 날짜를 확인하기도 한다.
온라인에는 ‘다이소 조명과 스노볼로 1만원대 크리스마스 트리 꾸미는 법’ 같은 꿀팁이 한가득이다. 다이소에서 3000원짜리 아담한 60cm 높이의 무장식 트리를 산 뒤 1000~2000원짜리 장식으로 꾸민다. ‘고급 크리스마스 미니 트리’라는 이름으로 같은 높이에 10만9000원까지 팔리는 완제품과 비교하면 10분의 1 가격으로 반짝반짝 트리를 집에 들일 수 있는 셈이다.
원룸에 사는 사람들은 벽이나 창문에 걸 수 있는 납작한 모양의 ‘벽 트리’를 택한다. 저렴한 데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 인기라고. 그마저 부담스러우면 ‘트리 스티커’를 붙인다. 이마트에 따르면 3000원짜리 트리 젤 스티커는 지난달 크리스마스 장식용품 누적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트리도 사치? 뜨개질로 뜬다
과거 호텔이나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다면 최근엔 “돈도 없는데 뭘 나가냐”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집 안을 꾸미는 소소한 장식 판매량이 늘어난다. 개중에는 ‘짠내 나는’ 소비도 있다. “트리도 사치”라고 생각해 빨강·초록색의 LED 전구만 구매한 뒤 집에 있는 식물에 두르거나(!) 뜨개질로 장신구를 뜨기도 한다. 유튜브에는 “동대문을 돌면서 값싼 가격의 트리 오너먼트를 찾아라” “당근마켓에서 공동 구매하면 더 저렴하다” 같은 조언을 담은 영상 조회수가 고공행진.
사례를 하나 소개한다. 직장인 김모(32)씨는 트리 오너먼트와 미니 트리를 만들기 위해 이달 초 양말을 만들고 버려지는 끝부분인 ‘양말목’ 200여 개를 6000원에 구매했다. 무슨 궁상이냐고? 놀랍게도 찾아보니 유튜브 관련 영상이 수십개. 요즘 인기란다. 김씨는 “크리스마스 용품뿐 아니라 꽃 키링이나 냄비 받침 등도 만들 수 있어 효용이 높다”며 “돈을 많이 써야만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맞는 말.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만 있다면 된 것이니 슬퍼 말고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