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B급 구르메’라는 말이 있다. 일반식당·주점·포장마차에서 평범한 재료로 만드는, 비싸지 않지만 그 맛은 구르메(gourmet·미식) 반열에 오른 서민 음식을 말한다. 도쿄에는 고급 레스토랑의 값비싼 요리가 부럽지 않은 B급 구르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스시·소바·라멘·돈가스·카레 등 도쿄를 대표하는 대중 음식 다섯 가지를 미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식당들을 돌아봤다.
◇스시: A급으로 승격한 원조 B급 구르메
스시는 도쿄에서 값싼 길거리 음식으로 출발했다. 에도마에즈시(江戶前壽司). ‘에도(江戶·도쿄의 옛 이름) 성문 앞(前)에서 파는 스시(壽司)’란 뜻이다. 일본에서 스시는 7세기부터 먹었지만, 오늘날의 스시와는 전혀 달랐다. 붕어 따위 민물생선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에 절이고 밥을 채워 삭혔다. 한국의 식해와 비슷했다. 16세기부터는 도시락 같은 틀에 밥과 생선을 담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숙성시켜 먹었다.
성미 급한 에도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했다. ‘이타마에 스시(板前壽司)’ 나카타 도시히로(中田敏博) 셰프는 “18세기 중반 에도성 앞 포장마차 주인들이 식초로 간한 밥에 생선살을 올려 팔기 시작했다”고 했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당시로서는 ‘패스트푸드’였죠. 노동자들이 끼니로 먹었기에 훨씬 컸어요. 어른 주먹만 했죠. 두세 입에 나눠 먹었을 정도였어요.”
과거 에도마에즈시는 도쿄 앞바다 등 일본 근해 생선을 쓰는 걸 원칙으로 했다. 스시집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이런 원칙을 지키는 스시집이 드물어졌다. 특히 참치는 가격이 폭등하면서 자연산 혼마구로(本マグロ·참다랑어)는 고급 스시집 아니면 맛보기 힘들어졌다. 대중적 스시집은 냉동·양식산이나 참다랑어보다 낮게 평가되는 황다랑어·백다랑어·눈다랑어 등의 참치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타마에 스시는 대중적인 가게로는 드물게 100% 자연산 혼마구로를 사용한다. 겨울·봄·가을에는 일본 근해에서 잡은 혼마구로를 도요스시장(豊洲市場·도쿄중앙도매시장)에서 공급 받고, 여름에만 스페인·이탈리아에서 지중해산 혼마구로를 공수한다. 나카타 셰프는 “여름철 일본 혼마구로는 기름이 빠지고 맛이 덜하다”고 했다.
19살 때 입문해 올해로 24년째라는 나카타 셰프가 쥐어준 혼마구로 스시를 맛봤다. 참치 뱃살 스시는 느끼할 때가 많다. 자연산 혼마구로 뱃살로 만든 스시는 기름지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참치 특유의 산미 덕분에 오히려 경쾌하고 산뜻했다. 혼마구로 등살·배살 스시 10개와 가느다란 호소마키(김밥) 6개, 고깔 모양 데마키 1개로 구성된 ‘최강 참다랑어 세트’가 4980엔(약 4만6000원).
회전초밥집처럼 싸진 않다. 하지만 자연산 참다랑어 스시를 이 가격에 맛보다니 감사할 일이다. 자연산 참다랑어와 도미, 고등어, 방어, 쥐치 등 겨울 제철 생선을 얹은 스시 10개와 호소마키 2개로 구성된 ‘에도마에 니기리 세트’는 2980엔(약 2만8000원). 도쿄에 10개점이 있고 서울에 곧 진출한다. 인터넷 홈페이지 itamae.co.jp/ko
◇소바: 에도 건설 노동자의 패스트푸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1603년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에도 막부를 세운다. 막부는 바닷물이 범람하던 지역을 매립해 땅을 넓혔다. 소바(蕎麦)는 ‘에도 신도시’ 개발 공사 노동자들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등장했다. 도쿄 소바는 찍어 먹는 쯔유(장국)가 교토·오사카보다 훨씬 짠데, 습한 한여름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간다아와지초(神田淡路町)는 아와지초 지하철역 출구를 중심으로 약 1km의 거리로 둘러싸인 삼각지대. 2차 대전 당시 전쟁 포화를 피한 도쿄의 몇 안 되는 오래된 번화가로, 1920~1930년대 옛 도쿄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도쿄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온 노포가 많다. 오래된 소바집도 많다.
‘간다마쓰야(神田まつや)’는 1884년 창업해 3대를 이어오고 있다. 과거 도쿄 동네마다 있었던 소바집의 정겨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해 질 무렵부터 길게 줄이 선다. 가게에 들어서니 마치 소바 면발처럼 길고 가늘게 자른 흰 종이를 천장에 걸어 늘어뜨린 게 인상적이다. 찢은 종이 다발을 장대 끝에 매달아 세웠다는 일제강점기 서울 냉면집들이 떠올랐다.
메뉴판을 펼치니 니신보(청어구이), 가마보코(어묵), 야키도리(닭꼬치) 등 술안주가 다양하다. 소바집은 메밀국수만 먹는 곳이 아니라 술도 마시는 곳이었다. 오래된 소바집들이 선술집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다. 하루 일과를 마친 직장인들이 안주를 곁들여 사케나 맥주를 즐긴 뒤 마무리로 소바를 먹는 풍경을 간다마츠야에서 여전히 볼 수 있었다.
소바 종류가 다양하다. 기본은 역시 모리소바(825엔). 초록빛이 도는 회갈색 면발에서 구수한 향이 올라왔다. ‘향으로 먹는다’는 소바는 겨울이 제철이다. 늦가을 수확한 햇메밀로 소바를 만들기 때문이다. 옆 테이블 도쿄 토박이들이 “면발 끄트머리만 쯔유에 찍어 먹어야 소바 특유의 구수한 풍미를 즐길 수 있다”고 알려줬다. 풍미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도쿄식 쯔유가 워낙 짜서 한국에서처럼 소바와 함께 들이켰다간 입이 짜서 큰일 난다.
고마소바(990엔)는 참깨를 넣은 쯔유가 나온다. 고소한 참깨와 구수한 메밀이 예상 이상으로 찰떡궁합이다. 자루소바(1045엔)는 소바 위에 잘게 찢은 김이 뿌려져 있고 와사비(고추냉이)가 함께 나온다. 덴모리(2530엔)은 모리소바와 새우튀김이 세트로 나오는데, 새우도 튀김옷이 바삭하면서 느끼하지 않게 잘 튀겼다. 어떤 소바건 한국과 비교하면 양이 적다. 소바만으로 식사하려면 두 판은 먹어야 양이 찰 듯하다.
◇라멘: 중국에서 건너온 일본 국민 음식
라멘(ラーメン)은 일본의 국민 음식이지만 그 뿌리는 중국이다. 화교가 들여왔지만 한국 대표 음식이 된 짜장면과 완벽하게 겹치는 역사를 가졌다. 과거 라멘은 ‘시나소바(支那そば)’라고도 불렀다. 시나는 중국을 낮춰 부르던 말이고, 소바는 메밀면뿐 아니라 국수를 통칭하던 말이다. 1910년 도쿄 아사쿠사 중식당 ‘라이라이켄(來來軒)’에서 낸 시나소바가 최초의 일본식 라멘으로 여겨진다.
라멘은 면보다 국물이 더 중요한 면요리다. 육수를 간장으로 간 하면 쇼유(간장)라멘, 소금이면 시오(소금)라멘, 미소된장을 넣으면 미소라멘이 된다. 돈코츠라멘은 육수 베이스로 돼지뼈(돈코츠)를 쓴다. 육류로는 돼지·닭뼈가 주로 사용되고 소뼈도 드물게 쓴다. 해산물로는 다시마, 가다랑어포, 말린 멸치·고등어 등이 있다. 육류와 해산물 육수를 섞거나, 기존에 쓰지 않던 재료로 각 라멘점만의 맛을 추구한다.
‘라멘지로 미타본점(ラーメン二郞 三田本店)’은 호불호가 극으로 갈리는 라멘점이다. 오전 8시30분 개점 시간에 맞춰 찾아갔지만 이미 대기줄이 입구부터 건물을 빙 돌아 뒤쪽으로 늘어섰다. 라멘 주문기에 돈을 넣으면 옛날 버스 회수권처럼 생긴 플라스틱 티켓이 나온다. 카드는 받지 않는다. 반드시 ‘소(小)’를 주문한다. 입구 옆 자판기에서 우롱차 한 병 반드시 구입한다.
냉면 그릇만 한 거대한 사발에 면·돼지고기·숙주·다진 마늘이 후지산처럼 우뚝 솟았고, 국물이 쓰나미처럼 넘실댄다. 양이 충격적으로 많다. 웬만한 대식가도 다 먹기 힘들다.
국물이 표면이 돼지기름으로 두껍게 덮였다. 그릇 표면과 테이블도 기름기로 번질번질하다. 돼지기름을 헤집고 국물을 떠 맛본다. 극한의 염도. 한국인보다 짠맛에 관대한 일본 사람들이 반드시 우롱차를 따로 사들고 입장하는 이유다. 면발은 설익었다 싶을 만큼 단단하다. 면발에 혀가 아릴 정도로 짜고 진한 국물과 돼지기름이 잔뜩 들러붙어 있다.
‘고문하려고 만들었나’ 하는 의심을 잠시 접고 계속 먹어보시라. 어느 순간 맛있게 느껴진다. 라멘지로에 중독된 순간. ‘지로리안(라멘지로 광팬)’이 또 하나 늘었다.
‘쓰타(蔦·Tsuta)’는 도쿄 최초로 미쉐린 별 1개를 받은 라멘집이다. 세련된 분위기, 서양의 조리법과 재료를 융합해 새롭게 창조한 맛과 담음새 등 라멘 스펙트럼에서 라멘지로와 정반대에 있다. 쇼유·시오가 각 2000엔으로 라멘 치고 비싸다.
쇼유라멘 위에 올리브 가루, 모렐·포르치니 버섯 크림 소스, 발사믹 트러플 크림, 스페인 이베리코 돼지고기, 죽순, 흑돼지 등심, 잼처럼 졸인 무화과, 파채가 올려져 있다. 셰프는 “소스와 고명을 조금씩 섞어가며 맛의 변화를 즐기라”고 알려줬다. 깔끔하고 담백한 국물이 차츰 복합적이고 진한 맛으로 변화했다.
‘라멘 가모토네기(ラーメン 鴨to葱)’는 도쿄 라멘계 신흥 강자. 오로지 오리(鴨)와 파(葱), 물로만 육수를 뽑는다. 오리를 이틀간 끓인다. 고명으로 올리는 오리고기는 콩피(confit) 방식으로 조리한다. 오리고기가 기름에 잠기도록 붓고 약한 불에서 천천히 익혀 부드러운 식감과 육즙을 보존하는 프랑스식 조리법. 파는 흰 부분만을 불에 구워 맛과 향을 살려 오리 콩피와 함께 라멘에 올린다.
돼지 등 육류나 가다랑어·고등어 등 해산물 육수보다 깔끔하면서 닭보다 진하고 구수한 감칠맛이 압권이다. 이 육수를 흠뻑 머금은 가느다란 면발과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오리고기 육수에 훈제 오리고기를 얹은 ‘카모난반소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기본 라멘(980엔)부터 오리 콩피·반숙 오리알·오리만두·죽순이 곁들여 나오는 특상(1480엔)까지 네 가지가 있다.
◇돈가스: ‘포크가쓰레쓰’라 부르는 노포들
유서 깊은 일본 돈가스집들은 돈가스 대신 ‘포크가쓰레쓰(ポークカツレツ)’라고 부르는 공통점이 있다. 포크 커틀릿(pork cutlet)의 일본식 표기. 돈가스(豚かつ)라는 명칭은 1929년 전직 궁내청 요리사 시마사 신지로가 우에노에 자신의 양식당 ‘폰치켄’을 열면서 처음 사용했다. 그전부터 돈가스를 내던 식당은 포크가쓰레쓰라는 명칭을 여전히 사용한다.
1905년 우에노 오카치마치(御從町)에서 창업해 4대를 이어온 ‘폰타혼케(ぽん多本家)’는 지금의 돈가스 원형을 만든 식당으로 인정 받는다. 일본 덴푸라 튀김법을 적용했다. 지방을 제거한 돼지등심을 섭씨 120도 낮은 온도에서 시작,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튀긴다. 겉이 타지 않으면서 육즙이 고스란히 남아 촉촉한 돈가스가 완성된다. 3850엔으로 돈가스치고는 비싼데, 밥·미소된장국·채소절임을 곁들여 먹으려면 550엔을 별도로 내야 한다.
◇카레: 영국 거쳐 일본 정착한 인도 음식
메이지 시대 영국을 통해 일본에 소개된 카레(カレー)는 쌀밥과 먹을 수 있도록 걸쭉해지는 등 일본인 입맛에 맞게 독자적인 진화를 거듭하며 국민 음식 지위에 올랐다. 도쿄 간다에는 카레 전문점이 모여 있다. 정통 인도식부터 유럽풍까지 가게마다 독특한 카레를 맛볼 수 있다.
간다 고서점거리에 있는 ‘본디 카레(Bondy Curry)’는 2011년 열린 제1회 ‘간다 카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한 카레 명가. 유럽풍 카레를 표방하지만 유럽에서 맛보기 힘든, 일본 카레의 변주다. 1973년 본디 카레를 창업한 무라타 고이치는 홈페이지에서 “1968년 프랑스로 유학 갔다가 공부는 못하고 카레만 개발했다”고 했다.
“친구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다가 프랑스 요리의 기초인 소스에 매료됐어요. 브라운 소스(brown sauce)에 카레를 섞고, 치즈 등 유제품을 듬뿍 넣어 풍성한 맛을 냈어요. 버터에 볶은 양파와 처트니(인도풍 과일 잼)으로 새콤달콤한 맛을, 후추로 매콤한 향신료 풍미를 더했죠.”
구글 맵으로 본디 카레를 검색하니 오래된 고서점 건물 뒷골목으로 안내했다. ‘여기 과연 식당이 있을까’ 싶은 건물 뒤 출입구에서 2층으로 길게 줄이 서 있었다. 종업원이 기다리는 동안 미리 주문하라며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비프·치킨·치즈·포크·새우 등 카레 12가지가 있었다. 대표 메뉴인 비프 카레(1600엔)를 주문했다. 카레는 맵기 단계를 고를 수 있는데, 가장 기본으로 주문했다.
자리에 앉자 허기부터 달래라는 배려인지 감자 두 알과 버터가 먼저 나왔다. 카레가 금방 따라 나왔다. 치즈가 뿌려진 밥이 독특했다. 기본 맛 카레는 어린아이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맵지 않았다. 단맛과 과일 풍미가 진했다. 걸쭉하면서 깊고 풍성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큼직한 소고기 덩어리는 오랫동안 푹 삶았는지 씹지 않아도 될 만큼 연했다. 밥에 뿌린 치즈가 따뜻한 카레에 녹아 숟가락으로 뜰 때마다 쭉 늘어나 먹는 재미를 더했다. 카레로 얼얼해진 혀를 달래줄 디저트로는 우유 맛 진한 ‘스무스 푸딩’(600엔)이 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