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곡나루역 앞 일본요리집 '정화'의 굴튀김과 모둠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그 시절 어른들은 술집에 따로 가지 않았다. 대신 집 안방에 상을 차려 술병을 올렸다. 부산 영도에 모여 살던 큰이모부와 작은이모부, 그리고 아버지는 가끔 모여 잔을 기울였는데 그때 안주라고 해봤자 저녁 먹고 남은 어묵볶음, 고구마줄기, 달걀부침 같은 것들이었다. 찬 바람이 불면 그제야 안주라고 할 만한 것들이 생겼다. 가을에는 뼈째 썬 전어를 양푼에 넣고 초고추장과 함께 비볐다. 겨울이 되면 날생선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김장을 할 때면 굴을 바가지로 퍼서 넣었다. 해가 일찍 지면 어김없이 술판이 벌어졌다. 동네 아저씨들은 한집에 모여 맥주와 소주병을 쌓아갔다. 아버지가 이웃집으로 술 마시러 나간 날이면 아이들은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지금 나 역시 그때 어른들마냥 날이 짧아 어둠이 급하게 찾아오면 집 안방처럼 아늑한 곳을 찾는다. 좁은 부엌에서 쓱쓱 생선전을 부쳐내던 큰이모처럼 주인장 솜씨가 좋다면 먼 길도 괜찮다. 재난에 가깝다는 지하철 9호선 급행을 타고 내린 곳은 마곡나루역이었다. 역에서 바로 연결된 건물 지하 1층에 ‘일본요리집 정화’라는 간판이 보였다. 가게를 찾아 자리에 앉을 때 조금 놀랐다. 혹시 몰라 예약을 전날 해둔 것이 알고 보니 마지막 자리였다. 주방을 지키는 두 남자는 2인극을 하듯이 앞뒤로 놓인 튀김기와 도마 사이를 오가며 썰고 튀겼다. 우리말이 유창한 일본인 직원은 성실한 학생이 노트 필기를 하듯 펜을 꾹꾹 눌러 메뉴를 받아 적었다.

일본요리집 '정화'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아무리 날이 차가워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맥주의 시원한 타격감을 놓칠 수 없었다. 잘 관리된 맥주 특유의 들꽃 향기가 자잘한 기포 속에 담겨 공기 중으로 퍼졌다. 널찍한 사기그릇에 담겨 나온 모둠회는 도미, 참치 등살과 뱃살, 찐 전복, 방어, 삼치, 무늬오징어가 한 점 한 점 얌전하게 포개져 있었다. 부산 살던 때처럼 회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리한 칼로 물을 가르듯 매끈하게 잘린 회의 단면을 보니 내 기분도 어딘가 정(正)해지는 듯했다. 일부러 젓가락 끝을 맞추고 다도(茶道)를 하는 무사처럼 조심히 회를 집어 입에 넣었다. 훈연을 한 삼치회는 아이스크림처럼 미끄럽게 녹아 내렸다. 겨울 한철 기름이 잔뜩 오른 대(大)삼치를 쓴 모양이었다. 기름기 많은 생선의 단조로울 수 있는 맛에 연기로 향을 입혀 다른 층위를 더했다.

술로 찐 전복은 바다에서 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두꺼운 육향을 냈다. 차가운 음식을 먹었으니 다음은 온도를 높여야 제격이었다. 일본식으로 거친 빵가루를 두껍게 익힌 굴튀김이 눈에 들어왔다. 새콤한 타르타르 소스와 함께 나온 굴튀김은 아기 주먹만 한 크기였다. 젓가락으로 속을 쪼개니 하얀 김이 안개처럼 흘러나왔다. 누군가 굴을 완벽하게 먹는 방법은 튀김이라고 했다. 굴의 물컹한 식감이 튀김의 바삭한 감각과 대조를 이룬다. 바다의 비린 맛은 튀김의 고소함으로 또 가려진다. 튀김옷 덕에 굴의 수분이 빠지지 않아 그 맛이 온전히 가둬진다. 이런 논리를 찾지 않더라도 굴튀김 한 접시에 맥주 한 잔을 깨끗이 비울 수 있었다.

일본요리집 '정화'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다진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뭉쳐 튀긴 멘치카츠를 주문하자 주인장이 바로 다진 고기를 꺼내 반죽부터 시작했다. 도톰한 반죽이 기름 속에 들어가는 모습을 야구 경기 보듯 구경했다. 잠시 후 튀김이 내 앞에 놓였다. 바사삭 소리를 내며 입속에 기름이 번졌다. 오이를 잘라 참깨 소스를 뿌린 간단한 음식조차도 소홀하지 않았다. 오이 껍질을 얇게 바르고 모양을 잡아 잘랐으며 무엇보다 시원하게 식힌 덕에 하얀 눈을 먹듯 명쾌하고 청량했다. 그 오이 한 토막에 술 한 잔을 마시며 옛 어른들 생각이 났다.

바라는 것 없이 자식들 잘되라며 그 사소한 야망 하나만 품고 살던 남자와 그와 함께 작은 칼로 생선을 자르고 몸을 숙여 세상을 견디던 여자가 있었다. 몸이 고단하여 위로할 것이 싼 술밖에 남지 않았을 때 집에서 남는 반찬을 추려 내고 또 먹던 그 마음을 지금은 알 것 같다. 나 또한 한 해가 갈수록 나로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줄어들고 대신 내가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든 버티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일본요리집 정화: 모둠회 2만9000원, 굴튀김 2만2000원, 멘치카츠 2조각 1만2000원, 오이 요리 ‘고마큐리’ 8000원

일본요리집 '정화'의 모둠회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