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얏꽃과 작약꽃밭의 노인
서울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 지붕 용마루에는 동판으로 만든 문양이 다섯 개 있다. 꽃잎 다섯 개가 그려진 꽃무늬다. 인정전 대문인 인정문 앞뒤에도 똑같은 무늬 세 개가 새겨져 있다. 창덕궁을 비롯해 조선왕조 궁궐 건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붕 장식이다. 오얏꽃이다. 맞다. 자두의 옛말이다. 전주 이(李)씨를 뜻한다. 같은 꽃무늬를 덕수궁 석조전 꼭대기와 덕홍전 실내에서도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시대에 오얏꽃은 각종 기물에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이 인정전 위 오얏꽃도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럴까?
더 낯선 사진이 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아래 사진) 인정전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평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인과 그 주변의 수많은 사람. 인정전 앞에는 지금과 달리 작약꽃이 피어 있다. 이 노인은 누구고, 저 꽃밭은 무엇인가. 궁궐 지붕에 피어 있는 오얏꽃, 그리고 앞마당에 활짝 핀 작약꽃. 혹시 우리가 알면 안 될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근대 조선의 상징, 태극
개성 왕씨 정권을 타도하고 건국한 조선은 전주 이씨의 나라였다. 그래서 건국 세력은 전주 이씨를 뜻하는 오얏나무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개국 1년 뒤 개국공신들이 ‘오얏나무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다’고 찬양하기도 했다.(1393년 9월 18일 ‘태조실록’) 하지만 오얏꽃이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이나 그림 소재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민간과 왕실에서는 사군자와 용 같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담은 소재들을 즐겨 그렸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도 조선은 국가 상징이 없었다. 6년 뒤 1882년 미국과 조약을 맺을 때 처음 등장한 상징물은 ‘태극기’다. 태극기는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양으로 활약했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을 때도 ‘거리에는 집집마다 태극 국기를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했다’.(1897년 10월 12일 ‘독립신문’) 1904년 10월 7일 발행된 대한제국 여권을 보면 교차된 태극기 아래에 오얏꽃이 함께 나온다. 그러니까 국가를 상징하는 문양은 태극기,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은 오얏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창덕궁 인정전 용마루에 있는 오얏꽃 다섯 송이 역시 전주 이씨 황실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언제, 누가, 오얏꽃을 붙였나
진실을 알려면 이 오얏꽃 문양을 ‘언제’ ‘누가’ 부착했는지 알아야 한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했다. 새 황제가 된 순종은 그해 11월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장기간 비어 있던 창덕궁은 이후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인정전 뒤쪽에 있던 월랑 해체를 포함해 1908년 7월 5일 시작된 수리 공사는 ‘일본인 감독하에 조선인은 전혀 없이 일본인 인부들이 동원돼’ 진행됐다.(1908년 7월 7일, 19일 ‘대한매일신보’, 7월 21일 ‘황성신문’ 등)
공사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다. 1909년 4월 말~5월 초, 프랭크 카펜터라는 미국 언론인이 순종을 알현했다. 당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도쿄에 있었고, 알현은 차기 통감으로 내정된 소네 아라스케가 동행했다. 미국 여러 신문에 기고한 기사 가운데 앨라배마주 버밍햄 ‘에이지-헤럴드’에 실린 ‘한국의 새 황제’라는 기사에서 카펜터는 ‘알현하던 날 큰 알현소(Audience Hall)를 만드는 목수들 망치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했다.(1909년 5월 9일 ‘에이지-헤럴드(Age-Herald)’)
그때 카펜터가 촬영한 사진 가운데 인정전 사진이 한 장 있다.(위 사진) 이 사진에는 공사가 한창인 인정전 마당과 비계를 설치한 좌우 월랑이 찍혀 있다. 그런데 지붕 용마루에는 오얏꽃이 보이지 않는다.
6개월이 지난 그해 11월 12일 일본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 일행이 창덕궁을 방문했다.(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고적조사의 기억’, 국립문화재연구소, 2016, p17) 여전히 공사는 진행 중이었다. 바로 그날 촬영한 인정전 사진(아래 사진)에는 비계를 걷어낸 좌우 월랑, 파헤쳐진 마당과 석조 구조물이 촬영돼 있다. 그런데 인정전에는 전등과 굴뚝, 그리고 용마루에 문제의 오얏꽃 문양 다섯 개가 보인다. 그러니까 저 꽃무늬는 1909년 5~11월 사이에 생긴 문양이다.
과연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일까. 아닐 확률이 훨씬 높다.
병합이 결정되고 황제는 대공(大公)으로
그해 3월 30일 일본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 명에 의해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스키쓰가 ‘대한정책방침 및 시설대강’을 작성했다. 한일병합조약의 기초가 된 이 보고서는 4월 10일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동의와 7월 6일 일본 내각 결의 및 일본 천황 재가로 확정됐다.
이 ‘대강’에 오얏꽃의 비밀을 풀 열쇠가 숨어 있다. 이러했다.
‘한국 황제는 폐위하고 현 황제를 대공(大公) 전하로 칭할 것.’ ‘태황제, 현 황태자 및 의친왕은 공(公) 전하로 칭할 것.’ ‘대공가 및 공가에 대해서는 경비를 국고에서 일정 연액을 지급할 것.’
대한제국 황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연금을 받는 수많은 귀족 가운데 하나인 대공으로 격하시킨다는 내용이다.(일본외무성, ‘고무라 외교사’, pp.840~842. 윤대원, ‘일제의 한국 병합과 한국 황실 처분의 정략적 함의’, 규장각 50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7, 재인용)
이 같은 결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인 손으로 개조된 인정전’ 오얏꽃의 비밀이다. 그 의도가 인정전 주변 건축구조에 정확하게 구현돼 있고, 지금도 남아 있는 흔적이 저 용마루 오얏꽃이다. 동서남북 행랑과 월랑들은 모두 실내 복도로 개조됐다. 이 같은 구조는 도쿄 메이지궁전(1888) 알현소 배치와 흡사하다. 메이지궁전 건축을 주도했던 인물은 궁내경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기세황, ‘20세기 초 창덕궁의 변형에 관한 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석사 논문, 201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는 당시 건축 도면 제목은 ‘알현소 및 부속 건물 평면도’다. ‘알현소’는 메이지궁전 준공 평면도에 등장한다. 1912년 ‘창덕궁 인정전을 모방하여’ 전면 보수된 덕수궁 덕홍전에도 실내에 오얏꽃 문장이 곳곳에 있다. 당시 덕홍전 명칭은 ‘알현실’이었다.(1912년 9월 10일 ‘매일신보’) 1917년 화재 후 재건된 창덕궁 희정당 현관에도 같은 오얏꽃 문양이 곳곳에 붙어 있다. 이 모두 ‘대한제국 황실’과는 거리가 멀다. ‘인정전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자주 사용하던 오얏 문양을 끌어온 것이기는 하되 대한제국의 권위를 짓밟는 데 사용됐다.’(홍순민, ‘우리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p260)
1913년 봄날, 그 ‘알현소’ 앞 풍경
1909년 11월 12일 세키노 일행이 목격했던 공사는 이듬해 봄에 완료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봄에 촬영한 사진(아래 사진)을 보면 바닥에 깔렸던 박석들은 모두 철거되고 작약 꽃밭이 조성돼 있다. 가운데에는 수조(水槽)가 설치돼 있다. 황제 권위를 상징하는 문무 품계석들은 동서 행랑 앞으로 이전돼 있다(사진 오른쪽 건물 기둥 아래).
그리고 어느 날 한 노인이 군중들과 함께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위쪽 단체사진). 순종이다. 평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순종 옆에는 군복 입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서 있다. 주변에는 총독부 관리와 조선 귀족들이 도열해 있다. 앞에는 작약꽃이 만발해 있다. 정확한 날짜는 1913년 5월 18일이다.(1913년 5월 21일 ‘매일신보’) 그런데 순종은 두루마기 왼쪽 가슴에 짙은 색 상장(喪章)을 달고 있다. 한복 입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군복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왼쪽 팔에 상장을 두르고 있다. 이건 또 뭘까.
1912년 7월 30일 천황 메이지가 죽은 것이다. ‘진실로 일본 국민이 된 자는 모두 상장을 두르고 붙이게 할 취지니’(1912년 8월 6일 ‘매일신보’. 이지수 등, ‘매일신보를 통해 본 일제강점기 상복의 근대화 연구’, 복식 226호, 한국복식학회, 2020, 재인용)
그 국장 기간이 끝나는 1913년 8월 1일까지 1년 동안 유흥을 절제하고 모두 상장을 착용하라는 권고다. 그리하여 꽃피는 화창한 5월, 창덕궁 이왕을 포함해 저 사진 등장인물 모두가 죽은 천황을 기리며 꽃놀이를 즐겼다.
조선왕공족
이렇듯 인정전과 인정문에 오얏꽃이 등장한 시기는 일본이 대한제국 병합을 결정하고 황제를 대공으로 격하하기로 확정한 시기와 겹친다. ‘황실사전’(富山方, 도쿄, 1938)은 일본 황족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이 사전에 천황가와 하위 22개 궁가(宮家) 및 왕공가(王公家) 문장이 소개돼 있다. ‘왕공가’는 조선 왕공족을 뜻한다. ‘창덕궁’(왕)과 ‘이건공가’와 ‘이우공가’를 말한다. 병합과 함께 대공으로 격하될 예정이던 황제는 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고집에 대공 위인 왕(王)으로 격하됐다.(고마쓰 미도리, ‘明治外交祕話’, 原書房, 1976, p285)
천황가 문장은 국화다. 일본 19개 궁가 문장도 국화를 응용했다. 게재 순서상 서열 20위인 창덕궁은 오얏꽃이다. 사동궁에 살던 서열 21위 이건공(의친왕)가 문장은 겹꽃잎 오얏꽃이다. 운현궁 이우공가 문장은 원으로 에워싼 오얏꽃이다.
사동궁은 2005년 철거되고 주차장으로 변했다. 사동궁에서 사용하던 차스푼에서 그 문장을 볼 수 있다.(아래 왼쪽사진) 운현궁은 대폭 축소됐다. 1910년대에 건축된 운현궁 양관(洋館)은 팔려서 지금 덕성여대 경내에 있다. 그 옥상 베란다 난간을 보면 저 황실사전에 실린 이우공가 문장이 남아 있다.(아래 오른쪽사진) 창덕궁 인정전 주변은 모두 복원돼 있다. 용마루 위 오얏꽃은 여전히 피어 있다. 역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왕공족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