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세가 불안해도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이제 곧 ‘트럼프 2기’가 시작된다. 이미 국내외 매체는 20일 출범하는 트럼프 2기의 정책과 그에 대한 대응 문제 관련 취재로 바쁘다.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동맹이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투자와 무역에서 미국과 긴밀한 상호 의존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의 부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북한 핵무장 등 우려를 공유하는 것도 유사하다. 그런 일본은 다가오는 트럼프 2기를 보며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까?
작년 12월 1일 일본의 대표적 출판사인 문예춘추(文藝春秋)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전 주미 대사 인터뷰를 보면 그 ‘고민’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스기야마 대사는 2018년부터 2021년 1월까지 주미 대사로 재직했다. 즉, 트럼프 1기 대부분의 기간을 워싱턴에 주재하며 관찰한 것이다. 그는 또한 2013년 6월, 아베 정부의 외무심의관(우리의 외교차관보)에 임명됐고, 2016년 6월에는 외무 사무차관으로 승진했다. 일본 외교에서 4년 반이나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의 의견은 자민당 주류가 트럼프를 바라보는 관점을 상당 부분 반영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우선 눈길을 끈 것은 트럼프 정부의 ‘과격화’ 가능성에 대한 그의 의견이었다. 트럼프는 급격한 관세 인상을 무기로 삼아 중국과 우방국들을 압박할 기세다. 게다가 이제 트럼프는 재선 걱정도 없고, 1기 당시 그에게 브레이크를 걸던 실무형 관료들, 군인들도 사라졌다. 정말 트럼프는 ‘급발진’할까?
스기야마 대사는 “아직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여전히 트럼프 캠프 안에 실무형 온건파와 ‘트럼프주의’를 우선하는 강경파가 혼재한 데다 전통적으로 미 상원에는 국정 전반의 안정성을 중시하는 중량급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견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집어 본다면 일본은 관세 무기화 등 급진적 정책 전환에 동의하지 않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트럼프 캠프 내 합리적 인사들 및 상원을 중심으로 일본의 입장을 펼치겠다는 말로 들린다.
국제정치 최대 현안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관련 예상 역시 유보적이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푸틴과 담판을 짓거나 중동 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즉각 중단시킬 것이라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현행 국제법과 유엔헌장 위반이 명백하기 때문에 단순히 “전쟁을 멈추자”는 명분만으로 지난 3년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중동 전쟁의 경우, 국제법적으로 하마스의 테러 행위가 용납될 수 없으며, 이스라엘에 자위권이 있지만 이스라엘 또한 지나친 살상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 역시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살육 중단이라는 명분과 국제법 준수라는 원칙 간 균형 잡힌 지혜로운 해법이 필요하나 트럼프라고 해서 이런 해법을 갑자기 찾아낼 순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역시 말은 부드럽지만, 미국이 국제 관계의 원칙을 무시한 채 일방적 해법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론으로 들린다.
미·일 간 주요 현안이 될 방위비 분담금과 무역 불균형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주일 미군 주둔 비용 지원의 대폭 증액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방위 역할 분담은 이미 기시다 정부에서 방위 예산을 GDP 1%에서 2%로 증액하기로 한 만큼, 일본이 동아시아 안보와 관련해 더 적극적 역할을 하라는 주문이라면 그것은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즉, 미국에 돈을 더 주는 것은 못 하겠지만 일본의 안보 역할 확대는 해보겠다는 것이다.
무역 문제의 경우, 최근 일본의 대미 무역 흑자가 급증(2016년 62조원에서 2023년 80조원)한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중국의 대미 무역 흑자(2022년 약 582조원)에 비하면 적다면서, 향후 트럼프 정부 대외 정책의 초점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했다. 또한 대중국 정책 추진에서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는 일본이라고 하면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한마디로 일본의 협조 없이 대중국 강경책을 펴기는 쉽지 않으므로 무역 문제로 일본을 지나치게 압박하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끝으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이시바 총리가 트럼프와 좋은 관계를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놀랍게도 스기야마 대사는 이시바 총리가 당장 트럼프를 만나야 한다거나 개인적 관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며, 그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나 이시바 총리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민주국가의 지도자로서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당당하게 대화하라고 주문했다. 쉽게 말해 트럼프가 뭐라 하든 일본의 국익에 기반하여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며, 그래야만 같은 민주국가의 지도자인 트럼프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민에서 우리가 배울 점, 공유할 점이 적지 않아 보인다. 공유하는 고민이 있다면 공조도 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국내 정세가 불안해도 누군가는 차분히 대외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가오는 ‘트럼프 폭풍’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