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을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스캔 작업을 직접 할 수 있어 MZ들에게 인기인 서울 충무로 고래사진관.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7일 오후 3시 인쇄소와 힙한 식당들이 뒤섞인 서울 충무로 골목. 밥집·술집은 영업 시작 전이고 거리는 한산했다. 이런 곳에 전국, 아니 글로벌 ‘필카(필름카메라) 성지’가 있다고? 1층엔 제주음식점, 2층엔 노래주점이 있는 한 허름한 건물 벽에 붙은 가로·세로 100cm 크기의 흰 간판을 간신히 찾았다. ‘고래사진관’이다.

1층에서 3층까지 한 번에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서니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필름카메라, 일회용 카메라, 토이카메라, 각종 필름을 전시해둔 매대를 지나 20여 명이 컴퓨터와 필름 스캐너를 붙잡고 앉아 있다. 제법 진지한 얼굴도, 키득키득 웃는 사람도. 필름을 스캔해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과정이다. 컴퓨터에서 취향대로 색감 등을 조정할 수 있는데 이 ‘셀프 스캔’을 할 수 있는 사진관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물 것이라고 한다.

필름을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스캔 작업을 직접 할 수 있어 MZ들에게 인기인 서울 충무로 고래사진관. 지난 6일 오후, 평일에도 이곳을 찾은 젊은이가 많았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우와! 크게 보인다.” 루페(확대경)로 필름을 들여다보던 아이가 소리쳤다. 10세·7세 아들과 고래사진관을 찾은 심지연(44)씨는 “대학 때 필카를 좋아했는데 10여 년 만에 다시 꺼냈다”며 “아이들도 체험해보면 좋을 것 같아 직접 일회용, 토이 카메라로 촬영하게 한 뒤 현상을 하러 왔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각자 일상과 친구 사진 등을 찍었다고 한다. “휴대폰에 익숙한 요즘 애들은 사진을 찍으면 바로 볼 수 있잖아요. ‘이건 좀 기다려야 한다’고 하니 오히려 기대가 커지더라고요. 아이 친구들도 현상한 사진을 한 장씩 달라고 하고요.” 엄마의 취향과 취미가 자녀에게 이어질 수도.

히잡을 두른 외국인도 보였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아우니(21)씨는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셀프 스캔을 해보려고 찾아왔다”며 “필카도 처음이고 스캔도 처음이라 헤매고 있지만 너무 재밌다”고 했다. 소셜미디어로 널리 알려지면서 여행 온 외국인들이 찾는 경우도 많다. 1년간 찍은 필름을 모아 맡긴 미국인, 한꺼번에 50롤을 스캔하고 간 캐나다인 등 국적도 다양하다.

9년 전 문을 연 고래사진관은 특별한 인플루언서 마케팅이나 광고 없이 알음알음 ‘느린 사진족’들 사이에 이름이 알려졌다. 레트로 열풍 덕인지 최근 몇 년 사이 MZ들을 중심으로 소비자가 크게 늘었다. 주말에는 대기하는 손님들이 건물 옥상까지 차지할 정도로 발디딜 틈이 없다고. 특히 일회용 카메라로 필름 한 롤을 채우고 이곳에 와 셀프 스캔을 하는 게 ‘데이트 코스’로 인기라고 한다.

필카의 매력은 단연 ‘기다림의 미학’이다. 쇼츠와 릴스, 즉각적인 반응과 자극에 익숙해진 요즘 MZ들이 오히려 정반대 아날로그에 끌리고 있는 것. 비용도 들지 않고 기다릴 필요도 없는 폰카 대신 필카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고래사진관을 운영하는 마임이스트 윤푸빗씨는 “내 카메라에 담긴 그 순간의 색감은 자신만 안다”며 “각자의 취향을 완전히 담은 결과물을 내는 데는 필름카메라가 더 적격일 것”이라고 말했다. 고래사진관은 35mm부터 대형 필름까지 모두 취급하는 종합현상소에 방점을 두고 출발했지만 지금은 셀프 스캔과 현상 의뢰 손님이 반반 수준이다.

일회용 카메라 주문 제작도 활발하다. 나이키·퓨마·올리브영 같은 브랜드들이 신제품 발매 등 이벤트 때 일회용 필카를 굿즈로 제공해 사진 경연대회를 여는 식이다. 가수 정승환 팬미팅 때는 정씨의 사진으로 겉포장을 제작한 일회용 카메라를 굿즈로 제작했다고.

필름을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스캔 작업을 직접 할 수 있어 MZ들에게 인기인 서울 충무로 고래사진관. 지난 6일 오후, 평일에도 이곳을 찾은 젊은이가 많았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셔터’가 뭔지도 모르고 카메라를 사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 고래사진관은 ‘손가락 사진 경연대회’를 열기도 했다. “뷰파인더와 렌즈의 위치가 달라 렌즈를 손가락으로 가리는 경우가 꽤 많아요. 폰카처럼 바로 확인이 불가능하잖아요. 나중에 보면 사진 모두에 자기 손가락이 찍힌 경우도 있어요.”(윤푸빗) 대회 때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모두 가려버린 ‘졸업사진’이 1등을 차지했다. MZ들은 이 또한 즐겁다. 스캔해 보니 중증 수전증 환자가 찍은 것처럼 온통 흔들린 사진뿐이어도 깔깔깔, 그 자체가 ‘느좋(느낌 좋다)’이라 한다고.

“필름 사진은 망한 사진이 없다.” MZ 필카족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흔들려도, 빛이 들어가도 그대로 낭만이라는 것. 필름이 ‘탁’ 하고 걸리는 소리, 셔터 누르는 ‘찰칵’, 플래시 터지는 ‘팡’. 아날로그가 사라진 시대에 다시 시작된 필름 시대의 효과음이 흥미롭다. 탁, 찰칵, 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