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가 머쓱해지는 순간, 온정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무안국제공항에 입점한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벌어진 ‘선결제 소동’ 때문이다. 지난달 말, 한 유튜버가 여객기 추락 참사를 겪은 유가족과 자원봉사자를 위해 해당 카페에 400만원을 미리 결제했다. 위로와 격려의 ‘선결제 릴레이’였다. 이윽고 한 자원봉사자가 해당 유튜버의 이름을 대며 커피를 주문했다. “결제분은 100만원어치였고 이미 끝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400만원이냐 100만원이냐,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돈을 낸 유튜버가 다시 카페에 방문하며 설전이 재개됐다. 이 내용이 소셜미디어에 퍼지며 큰 논란이 됐다. 장소도 장소였고 시기도 시기였기에. 결국 두 차례에 걸쳐 400만원(100만원+300만원) 결제가 이뤄진 사실이 확인됐다. 프랜차이즈 본사까지 나서 “급하게 선결제 내역을 수기(手記)로 작성한 데다 교대 근무 등으로 착오가 생겼다”고 해명했지만, 성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주문 가능 메뉴를 아메리카노·카페라테로 한정한 사실도 도마에 올랐다.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메뉴를 강제하느냐.” “카페 선결제 대신 ‘커피 차량’을 보내는 게 낫겠다.” 자칫 자영업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돈 받았으면서… “무료 배식 취급”
일정 금액을 결제하고 금액 한도 내에서 누구나 음식 등을 먹을 수 있도록 조치하는 ‘선결제’가 새로운 한국식 기부 문화가 돼가고 있다. “먹고 힘내자”며 크게 한턱 쏘는 일. 지난달 대통령 탄핵 찬성·반대 집회를 기점으로 불이 붙었고, 지금도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 식당·카페 등에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감자탕 100그릇, 김밥 200만원어치 등을 미리 결제한 누군가가 소셜미디어로 식당 상호와 ‘암구호’를 공유하면, 누구나 이 암구호를 대고 해당 매장에서 음식을 받아가는 시스템. 최근에는 기획재정부 세종청사 내 카페(160만원)로도 릴레이가 번졌다. 가수 아이유·뉴진스 등 연예인이 촉발했고 이후 일반인도 대거 가세하면서, 선결제 매장 위치와 재고 현황을 실시간 제공하는 온라인 지도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다만 미담이 늘 아름답게 끝나는 건 아니다. 지난달 “선결제 매장에서 홀대받았다”는 씁쓸한 후기가 잇따랐다. “선결제 주문이 배달 주문에 계속 밀려 40분 넘게 기다리다가 중간에 나왔다”거나 “거지 취급 당하는 것 같아 그냥 다른 매장 가서 내 돈 주고 사 먹었다” 같은 증언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달궜다. 예상보다 많은 손님이 몰리면서 응대가 미흡해지거나 명민하게 대처하지 못해 기부자의 선심이 훼손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회사원 박모(39)씨는 “선결제 금액이 제대로 소진됐는지 확인할 방법도 사실상 없지 않느냐”며 “호의가 호의로 남으려면 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취지는 좋지만… 돈 떼일까 불안해
“선결제 두 건으로 올해 마지막 날도 다행히 살았네요….” 지난달 카페 업주들이 모인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처럼, 현금 유동성이 중요한 자영업자들 입장에서는 거금의 선결제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고정 고객을 확보할 수 있어 안정적인 가게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자영업 살리기에 선결제가 동원되는 이유다. 선결제가 처음 전국적인 움직임으로 대두한 건 2020년 코로나 사태 당시.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가 앞장서 독려했으니 이른바 ‘착한 선(善)결제’ 캠페인. 이후 신한은행이 인근 식당·카페에 약 15억원을 선결제하는 등 사기업으로도 번졌다. 이에 소상공인연합회가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경제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전기가 열리기를 바란다”면서.
경기가 악화되자 선결제 운동은 지자체를 중심으로 다시 불붙고 있다. 지난 2일 김해시는 “자영업자 보호를 위해 직원 식대 등을 인근 식당에 선결제하는 ‘착한 선결제’ 운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박형준 부산시장, 지난 6일에는 이재준 수원시장이 선결제 캠페인 추진 계획을 밝혔다. “저도 우선 10만원씩 두 군데(식당·빵집)에 했는데 간부들과 기관장, 시민들도 동참했으면 좋겠다.” 다만 선결제를 했다고 해서 전액 소진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코로나 당시에도 “선결제한 가게가 사전 공지도 없이 폐업”해 버리는 황당한 상황이 보고됐기 때문이다. 소송비가 더 나오는 경우 법적 다툼을 하기도 애매하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결제 금액이 그리 크지 않다 보니 따로 안전장치를 마련하지는 않았다”며 “믿고 맡기는 것”이라고 했다.
◇정산 내역, 더 투명하게 공개돼야
대부분의 경우 선결제는 장부에 수기로 작성된다. 이름과 금액을 펜으로 적고, 매번 차감 내역을 덧대는 방식이다. 계산 실수 및 분실 가능성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손님 입장에서는 불안하고, 업주 입장에서는 불편한 상황이 언제든 연출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받을 때는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게 사람 마음. “공짜밥 해주는 느낌이 별로라 선결제는 받지 않는다”는 식당 사장도 있었다. ‘먹튀’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지난해 9월 광주광역시에서는 선결제 할인가로 필라테스 회원을 모집해 1인당 많게는 100만원 상당의 수강료를 받은 뒤 폐업·잠적한 30대 여성이 검찰에 넘겨졌다. 경찰이 파악한 피해자는 340여 명이었다.
투명한 선결제 관리 필요성이 등장한 배경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정식 출범한 앱 ‘단골가게’는 카페·분식집·미용실 등에서 해당 앱으로 선결제 시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지속적인 이용 내역을 기록해주는 서비스다. 가게가 폐업하면 환불까지 책임진다. 현재 서울 시내 4000여 가게가 참여하고 있다. 최근에는 집회·시위 관련 ‘선결제 지도’ 제작사와도 협업해 실시간 잔여분 등이 표시되도록 기술을 지원했다. ‘단골가게’ 운영사 1인치 김율 대표는 “착오가 발생하면 자칫 싸움이 될 수 있고 이번 무안공항 카페 소동도 그런 맥락 아니냐”며 “내역과 정산의 신뢰가 담보돼야 나눔의 방식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식당 너머… ‘책방’도 선결제 훈풍
추울수록 따스한 마음, 선결제는 동네 서점으로 넓어지고 있다. 양식을 꼭 입으로만 섭취하는 건 아니기에. 경기도 김포의 꿈틀책방에는 정기적인 선결제 고객이 50명 정도 된다. 책을 현금 매입해 구비해두는 동네 책방의 특성상 현금 유동성이 중요하다는 걸 고려한 단골손님들의 자발적 배려다. “동네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해달라”는 선결제도 늘어, 초등학생 6명 내외에게 매달 책을 선물하고 함께 읽는 행사도 5년째 진행되고 있다. 이숙희 대표는 “지난달에는 중학교에 올라가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그간 고마웠다’며 동생들을 위해 10만원을 선결제하셨다”면서 “시국은 어수선하지만 멋진 손님들 덕에 멋진 새해를 맞았다”고 말했다.
서울 공항동에 있는 다시서점은 ‘아이들을 위한 책 선결제’ 서비스를 재작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5만원부터 100만원까지 선결제하면 금액만큼 지역 아이들에게 책을 전달하는 후원 프로그램이다. 인근 방화중·공항중·송정중·경서중학교 등에 책이 전달됐다. 강원도 춘천의 책방 바라타리아는 2022년 오픈 당시부터 독특한 제도를 하나 진행하고 있다. 선물하고픈 책을 골라 선결제하면(어른), 전용 서가에 놓인 해당 책을 누구나(청소년) 가져갈 수 있다. 이름하여 ‘미미책’. ‘미래로 보내는 미리 계산한 책’의 줄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