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화남정돼지국밥'. 돼지뼈를 3시간 가량 끓인 육수에 특수 부위인 항정살을 듬뿍 넣는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역에서 나오니 구수한 돼지국밥 냄새가 코를 휘감는 듯했다. 역 주변에만 돼지국밥집이 열 곳이 넘으니 그럴 만도. 부산은 돼지국밥의 도시이다. 부산 토박이로 시인이자 음식문화 칼럼니스트인 최원준씨는 돼지국밥을 “역사와 문화, 기질 등 부산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솔푸드(soul food)”라고 정의한다.

돼지국밥은 정서적으로만 부산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부산에서 어떤 음식보다 많이 팔리고 또 먹는다. 상호에 ‘돼지국밥’이 들어간 부산 소재 음식점은 692곳(2019년 소상공인진흥공단 상가업소정보). 전국으로 시야를 넓히면 2703곳인데, 이 중 26%가 부산에 있는 셈이다. 상호로 내세우지 않았지만 실제로 돼지국밥을 취급하는 식당은 더 많다. 모두 742곳으로 돈가스(365곳)의 2배, 스파게티(54곳)의 13배가 넘는다(2019년 한국외식업중앙회 부산시지회).

부산의 돼지국밥 사랑은 검색량으로도 확인된다. 구글트렌드는 2004년 이후 2개 이상 검색어의 검색량 비율을 지역별로 제공한다. 대중 음식의 대명사인 짜장면과 돼지국밥 검색량을 도시별로 비교했다. 전국적으로는 짜장면 검색량이 돼지국밥을 압도했지만, 유일하게 부산은 60대40으로 돼지국밥이 짜장면을 추월했다.

2025년 1월 현재 부산 최고의 돼지국밥집은 어디일까? ‘아무튼, 주말’이 음식·외식업계 전문가 10명에게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부산 돼지국밥집을 10곳씩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본인과 관련된 곳은 배제했다. 1등부터 10등까지 10점부터 1점까지 매겨 합산했다. 잘하는 돼지국밥집이 너무 많고 스타일 차이도 큰 게 문제였다. 어렵게 뽑아낸 ‘부산 돼지국밥 베스트 10′을 이제 공개한다.

부산역 밖으로 나오면 어디선가 돼지국밥 냄새가 풍겨오는 것만 같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부산 돼지국밥 1·2·3세대

부산 돼지국밥 베스트 10을 보면 관록 있는 노포들이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합천국밥집’(1위) ‘자매국밥’(2위) ‘장터국밥’(3위) ‘영진돼지국밥’(4위) ‘양산국밥’(6위) 등 2세대 돼지국밥집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신창국밥’(5위) ‘60년전통할매국밥’(10위) 등 1세대들이 노익장을 뽐낸다. 여기에 3세대 또는 3.5세대라 불리는 ‘진돼지곰탕’(8위) ‘화남정돼지국밥’(9위) 등 패기 넘치는 신흥 강자들이 도전하는 형국이다.

그래픽=송윤혜

부산 돼지국밥집들은 크게 1~3세대로 분류한다. 1세대는 6·25전쟁이 터진 1950년 이후 전국에서 피란 온 이들이 생계를 위해 돼지 머리, 내장 등 부산물로 시장에서 끓여내던 곳들이다. 박정배 음식 작가는 “부산 돼지국밥은 경상도식과 이북식이 섞여 만들어졌다”고 했다. “국물이 곰탕처럼 진하고 뽀얀 돼지국밥은 경상도식입니다. 이북식은 맑아요. 순대, 다대기(다진 양념)도 원래 이북식이죠”. 최원준씨는 “이북 고기 육수와 순대, 제주 몸국과 고기국수, 경남 밀양의 쇠머리 육수 돼지국밥, 일본 돈코쓰 라멘, 대구·경북의 따로국밥도 부산 돼지국밥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부산 돼지국밥 1세대로 꼽히는 '신창국밥'의 국밥(왼쪽)과 수육밥에 딸려 나오는 수육.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세대는 생계를 넘어 외식업으로 발전한 식당들이다. 돼지 뼈를 우린 뽀얀 국물에 전지·후지 등 저렴한 부위와 순대를 썰어 넣은 스타일이 많다. 1980년대부터 주요 상권에 속속 들어섰다. 3세대는 항정살처럼 비싼 특수 부위를 써서 고급화한 곳들이다. 1·2세대의 자손이 운영하는 곳이 많다. 서울 ‘옥동식’에서 영향받아 버크셔K 흑돼지·부추 오일을 활용하거나 일본 돈코쓰 라멘처럼 육수를 진하게 뽑는 등 요리 수준의 돼지국밥을 내는 곳들은 따로 3.5세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번에 1위를 차지한 ‘합천국밥집’은 2세대에 속한다. 투명하다 싶을 만큼 맑고 군내가 전혀 없으면서 감칠맛 짙은 육수가 인상적이다. 보통 고기 육수는 맑고 뼈 육수는 뽀얗다. 이 가게는 고기와 사골을 함께 쓰는데도 국물이 맑다. 사골을 오래 끓이지 않고 건져내기 때문이다. 맑으면서도 사골의 깊은 감칠맛이 더해졌다. 지성우 울산 맛찬들왕소금구이 대표는 “평양냉면 육수처럼 불필요한 기름기와 잡내가 없고, 깔끔하면서도 풍부한 맛의 층이 느껴졌다”며 “첫 숟갈을 떴을 때는 심심한 듯싶었지만 한 숟갈 한 숟갈 이어질수록 그 깊은 맛에 이끌려 다대기를 풀지 않은 상태로 국물만 계속 떠 먹게 됐다”고 했다.

밥은 말지 않지만 고기를 뜨거운 육수로 데우는 토렴을 고수한다는 점도 특별하다. 이처럼 전통을 지키되 전통 안에서 혁신을 통해 업그레이드한 맛으로 30대부터 60대, 부산 토박이부터 서울내기까지 두루 높은 점수를 줬다. 지난해 프랑스 식당 평가서 ‘미쉐린 가이드’가 빕구르망(가성비 맛집)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합천국밥집’ 따로국밥.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이번 설문조사에서 2위에 오른 '자매국밥'.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위에 오른 ‘자매국밥’은 전라도식 돼지국밥이 부산 돼지국밥으로 융합된 경우다. 전라도식으로 돼지머리를 쓴다. 돼지머리는 입술이 쩍쩍 붙는 듯한 진한 국물과 감칠맛이 장점이나, 자칫 군내가 날 수 있어 다루기 까다롭다. 전남 고흥이 고향인 여주인이 잡내 없이 점성 높은 감칠맛만 기가 막히게 우려낸다. 여주인은 “돼지머리를 3번 끓이는데 마지막 물은 버리는 게 비법 아닌 비법”이라고 했다. 국밥이 나오기 전 돼지 머릿고기·허파·간이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처럼 작은 접시에 담겨 먼저 나오는데 이것만 팔아도 대박 났을 듯하다. 겉절이김치, 섞박지 등 국밥에 딸려 나오는 김치도 남도 특유의 맛이 느껴진다.

3위를 차지한 ‘장터국밥’은 부산 서구 구세산부인과 병원 뒷골목에 숨어 있는데도 외지는 물론이고 일본 등 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박정배 음식 작가는 “옛 방식의 조리법을 깔끔하게 다듬어 다이아몬드처럼 정교하고 순수한 맛을 지닌 돼지국밥”이라고 평했다.

살이 넉넉하게 붙은 돼지 다리뼈를 3시간 이내로 끓인다. 주인 우점순씨는 “돼지 뼈는 소보다 가늘어서 너무 오래 끓이면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중간 농도 육수는 고소하면서 군내가 없다. 소뼈 국물에 익숙한 서울 출신이라면 입에 맞을 듯하다. 얇게 저민 돼지 앞다리살이 푸짐하게 들었다. 수육백반은 항정살만 접시에 담아 돼지국밥 국물, 공깃밥과 함께 나온다.

돼지 다리뼈를 끓인 육수에 전지를 썰어 넣는 '장터국밥'.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장터국밥’ 주인 우점순씨.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4위에 오른 ‘영진돼지국밥’은 뽀얀 사골 국물에 양파 양념을 풀면 진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난다. 항정살 수육에 두부김치를 곁들이는 수육백반도 국밥만큼 많이 찾는다. 1995년 김성호씨 부부가 지금의 절반 크기로 시작했고 아들 도원씨가 일찌감치 부모를 도와 2대 경영을 하고 있다.

해운대 ‘양산국밥’은 토렴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토렴국밥이 따로국밥보다 1000원 더 비싸다. 다른 국밥집 대부분은 따로국밥이 더 비싸다. 밥이 담긴 그릇에 육수를 붓고 따라내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토렴은 한때 비위생적으로 보이거나 먹다 남은 밥을 재사용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최원준씨는 “토렴은 국밥을 오래 따뜻하게 먹기 위해 ‘국과 밥’을 한 음식으로 일체화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식은 밥 속으로 뜨겁고 진한 국물이 흡수되어 국의 영양과 풍미를 온전히 품어내면서도 밥알에서 빠져나오는 전분의 양을 일정하게 조절해줍니다. 토렴을 하면 국물의 맛도 훼손하지 않고 밥의 식감도 살리면서 오래도록 적당하게 뜨거운 국밥을 맛볼 수 있지요.”

박종호 부산일보 선임기자는 “전체 밸런스에서 이 가게를 첫째로 꼽았다”고 했다. “고기 질, 국물 농도가 적당하고 청결·친절이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전통 소주 ‘일품진로’ 나 일본 위스키 ‘히비키’ 등을 잔술로 마실 수 있는데, 개인 취향이 존중받는 느낌입니다.”

◇뽀얀 뼈 육수 vs. 맑은 고기 국물

1950~1960년대 창업한 이른바 원조 돼지국밥집 중에서는 ‘신창국밥’이 5위, ‘60년전통할매국밥’이 10위에 오르며 노포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신창국밥은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등 유명 인사가 많이 다녀간 집으로 유명하다. 1969년 서혜자씨가 국제시장에서 탁자 2개로 시작해 토성동 본점과 3개 지점으로 컸다. 맑은 갈색 국물이 독특하다. 시래기, 숙주나물, 두부 등 17가지 재료로 만든 순대 삶은 국물에 사골, 고기를 삶아 만든다. 국밥과 수육에 모두 살코기와 순대, 내장이 같이 들어간다. 순대 맛이 특히 좋다.

유명 인사들이 앉았던 자리에 이름표를 붙여둔 ‘신창국밥’ 본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60년전통할매국밥은 평양에서 피란 온 고 최순복씨가 1956년 삼화고무공장 앞에서 시작했다. 비계째 숭덩숭덩 썬 고기가 듬뿍 든 맑은 국물에 송송 썬 파와 고춧가루를 띄운, 돼지국밥깨나 먹어봤다는 마니아에게도 낯선 모양새다.

부산 돼지국밥은 ‘부산’이라는 지역과 ‘돼지’라는 재료만 같을 뿐 맛 편차가 심하다. 다양한 부산 돼지국밥을 가장 확연하게 구별하는 기준은 육수다. ‘뽀얀 육수’ ‘중간 육수’ ‘맑은 육수’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뽀얀 육수는 주로 돼지 다리뼈를 고아 뽑는다. 진하고 구수하다. 제주 몸국과 고기국수, 일본 돈코쓰 라멘, 밀양 소 사골 돼지국밥과 닮았다. 중간 육수는 ‘조금 연한 육수’라 부르기도 한다. 돼지 뼈와 고기, 내장을 함께 쓰거나 돼지머리를 통째로 넣고 육수를 낸다. 깊은 맛과 감칠맛이 뛰어나다. 이북 피란민들이 부산에 정착해 돼지머리를 활용하면서 퍼졌다. 최원준씨는 “상업화된 부산 돼지국밥의 원형쯤 된다”고 했다.

맑은 육수는 수육용 돼지고기를 삶아 육수를 낸다. 서부 경남 돼짓국에서 유래했다. 돼지 누린내나 잡내 없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국밥에 들어가는 고기 고명도 다양하다. 돼지머리에 붙은 볼살 등 머리고기를 사용하거나, 내장이나 순대를 함께 쓰고, 돼지 목살과 다리살을 쓰는 등 다양하다.

3세대 부산 돼지국밥집들은 맑은 육수로 돼지국밥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이고, 삼겹살·항정살 등 비싼 부위로 고급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7위에 오른 ‘합천일류돼지국밥’은 다진 마늘과 다대기를 왕창 올려서 진하고 강렬한데 의외로 개운한 맛이다. 김미주 국제신문 기자는 “돼지국밥 본연의 스타일은 지키되 간 마늘로 풍미를 내 감칠맛을 살리고 냄새도 덜하다”고 했다. 밥과 반찬 셀프 리필 서비스를 앞서 도입했다. 밥 대신 우동 면을 넣은 ‘돼지우동’도 인기다.

버크셔K 흑돼지를 사용하는 ‘진돼지곰탕’의 돼지곰탕.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진돼지곰탕'의 버스켜K 냉수육.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8위에 오른 ‘진돼지곰탕’은 문 연 지 1년이 되지 않았지만 MZ세대에선 이미 인기 맛집으로 등극했다. 맛과 인테리어, 담음새, 서비스에서 전형적인 3.5세대 돼지국밥집이다. 2층에 있는 식당은 기다란 바 형태 테이블이 주방을 감싸고 있다.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려고 접시에 뒤집어 놓은 컵을 집어 들었더니 비타민 한 알이 놓여 있다.

돼지곰탕은 맑고 투명한 국물에 밥이 말려 있고 얇게 저민 돼지고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국물과 고명은 모두 지리산에서 키운 버크셔K 흑돼지 고기를 사용한다. 국물에는 초록빛 ‘부추 오일’이 동동 떠 있다. 부드럽게 삶은 돼지고기는 훈연 처리를 했는지 불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군내 등 불쾌할 수 있는 냄새는 전혀 없었다. 평양냉면집에서 파는 제육 같은 ‘버크셔K 수육’을 냉·온 두 갈래로 낸다. 전통주 리스트가 있어서 ‘한산소곡주’ ‘해창막걸리’ ‘이강주’ ‘풍정사계’ 등 요즘 MZ들에게 인기인 전통주를 돼지국밥과 취향대로 페어링해 즐길 수 있게 했다.

2017년 서울에서 오픈해 뉴욕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며 ‘돼지국밥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서울 서교동 ‘옥동식’의 영향이 여실히 느껴진다. 서울에 거주하는 한 선정 패널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현대적인 맛이지만, 서울에서 맛볼 수 있는 스타일의 돼지국밥을 부산에서 그것도 아류를 맛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화남정돼지국밥’은 돼지 사골 국물에 특수 부위인 항정살을 고명으로 쓴다. 비싼 항정살에서 가장자리 비계를 50% 이상 제거한 살코기 정심 부위만 사용한다. 김영배 대표는 “사실 항정살은 지방이 좀 있어야 맛있지만, 젊은 손님들은 지방을 극도로 꺼리기 때문에 최대한 제거하고 낸다”고 설명했다.

'화남정돼지국밥'의 항정살국밥.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