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한상엽

1947년 11월 14일, UN총회에서 ‘한국 독립 문제 결의안’이 찬성 43표, 반대 0표, 기권 6표로 채택되었다. 결의안은 ‘1948년 3월 31일’ 이전 UN 감시 아래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른 비밀투표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못 박았다. 결의안대로 추진된다면 그로부터 불과 5개월 안에 ‘한국 통일 정부’가 가시화될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 문제의 UN총회 회부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사안이었다. 한국 문제가 UN총회 의제에 오르는 것부터 반대한 소련은 미국에 “1948년 초까지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에서 동시 철수하고, 그 후 한국인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자”고 역제안했다. 결의안 투표에 앞서 소련은 “UN총회가 결의안을 채택한다고 하더라도 소련은 그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 천명했다.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된 결의안이었지만, 원안대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미국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한국의 운명을 결정할 ‘1947년 연말 정국’에서 ‘좌익’은 단결해 한목소리를 냈다. 1946년 11월, 좌익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등 3당을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출범시켰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등 수많은 산하 단체가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한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947년만 해도 ‘국대안 반대 투쟁’ ‘3‧22 총파업’ 등 굵직한 반정부 투쟁으로 미군정 체제와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

모스크바협정의 틀 안에서 소련과 협상을 통해 한국 문제를 풀어가려 했던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중도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미군정이 민정(民政) 이양을 추진하며 1946년 말 민선의원 45명, 관선의원 45명으로 출범시킨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의장에 중도파 김규식이 선출되었다. 이듬해 2월 ‘남조선과도정부’의 행정 수반인 ‘민정장관’ 자리에도 중도파 안재홍이 임명되었다.

이처럼 우익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정치 환경이었건만, 우익은 단결은커녕 이승만계, 김구계, 한민당계로 분열돼 진영 안에서 주도권 다툼에만 열을 올렸다. 대의기구도 김구계의 ‘국민의회(국의)’와 이승만계의 ‘한민족대표자대회(민대)’로 분열되었다. 1947년 2월 반탁 운동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김구의 제안으로 결성된 국의는 한독당을 비롯한 63개 단체가 참여했고, 남북 13도 대표 50명으로 구성되었다.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대한민국 유일의 입법기관’임을 표방했지만, ‘임정법통론’에 지나치게 천착한 나머지 김구와 임정 지지자를 넘어선 진정한 우익의 구심점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민대’는 “민의에 입각한 정부 수립 운동이 필요하다”는 이승만의 제안으로 입법의원에서 입법한 보통선거법에 따라 1947년 7월 전국 선거를 실시해 선출된 대의원 200명으로 조직되었다. 비슷한 성격의 우익 대의기구였던 만큼, 민대는 출범 직후부터 국의와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구와 국의의 비타협적 권위주의 탓에 통합 논의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국의는 “국의가 민대를 흡수‧통합하고, 민대 대의원을 심사해 친일파를 배제한 후 개별적으로 영입할 것”이라는 입장에서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다. 민대는 국의에 ‘단체 대 단체’로 흡수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민대 대의원이 개별적으로 심사를 받아서 흡수되는 모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국의는 ‘임정이 미군정으로부터 주권을 인계받는 방식’으로 정부 수립을 주장한 반면, 민대는 ‘미군정과 협조하에 보통선거법에 의한 선거’로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국의가 끝까지 타협을 거부하자 이승만은 “민대는 ‘허명무실한 정부 조직’(임정)보다는 미군정 당국의 협조를 얻어 자율 정부의 기반인 총선거를 준비하겠다”며 국의와의 통합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한동안 냉랭했던 이승만과 김구는 UN총회 결의 이후 우익 통합 논의를 재개했다. 우익이 분열된 상태에서 코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치르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김구를 여러 차례 만나 총선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켰다. 11월 24일 “UN 결정을 소련이 거부해서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된다면 국토를 양분하는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던 김구는 불과 일주일도 되기 전인 30일, 이화장에서 이승만과 회담한 후 총선거에 참여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만일 소련의 방해로 북한의 선거가 불가능할지라도, 나중에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총선거를 치러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이는 단독 정부가 아니며 법리상으로나 도의상으로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 정부이다. 이승만 박사의 주장도 결국 나의 주장하는 바와 동일한 것인데 세인은 이를 오해하고 있다”(조선일보, 1947.12.2)

이튿날 이승만과 김구는 국의와 민대의 통합을 재추진하고, 12월 12일에 합동대회를 개최한다는 합의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이승만계, 김구계, 한민당계로 뿔뿔이 흩어져 서로 헐뜯고 비난하기를 일삼았던 우익은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 앞에 대통합을 이루는 듯했다.

1947년 12월 8일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된 장덕수의 장례식. 왼쪽 2번째 팔짱을 낀 김구, 가운데 부근에 모자를 벗고 앉아 있는 이승만이 보인다. 장덕수의 죽음 이후 이승만과 김구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한다.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2월 2일 밤,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현직 경찰이 포함된 청년 2명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범행을 실행한 청년들은 모두 김구가 총재로 있던 청년 단체의 간부였고, 그 배후로 체포된 김석황, 신일준 등은 모두 김구의 측근이자, 한독당과 국의의 핵심 간부였다. 기소된 피의자 모두 김구의 지시를 받고 범행을 도모했다고 자백했다. 체포 당시 김석황은 김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미군을 배경으로 임정 법통을 무시하는 도배(徒輩)들이 무죄한 사람을 다수 체포하여 죄를 씌우려 하니 이런 통탄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 박사와 한민당 도배가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 박사에게 가면 인민은 도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동아일보, 1948.3.4)

장덕수 암살 사건이 한독당 극단주의자들의 한민당 수뇌부에 대한 테러로 드러나자, 국의와 민대의 통합은 또다시 무산되었다.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라는 김구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도리어 “김구의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 ‘사법 리스크’로 우익에서 밀려나 정치적 위기에 내몰린 김구는 중도파 김규식과 연대해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 협상을 주장하고 나섰다. 극우 극단주의자들의 돌출 행위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대한민국은 좀 더 많은 정치 세력의 축복 속에 출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48년 1월 8일 김포비행장으로 입국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환영하기 위해 도열한 군중 /국가기록원

<참고 문헌>

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1998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정인기, ‘테러리스트 김구’, 미래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