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판 모르는 사람이 “함께 동네를 걷자”고 한다. 산책도 좋단다. 한 술 더 떠 “걸으면서 꽃도 같이 심자”고 한다.
최근 지역 생활 기반 중고 거래 앱 ‘당근마켓’에 이런 글이 우후죽순 올라오고 있다. 팍팍하고 비정한 서울에 드디어 이웃 간의 정이 싹트는 것일까? 찐 감자 같은 것도 가져와 걸으며 나눠 먹고 그러는 것일까? 호기심에 서대문구 홍제2동에 산다는 사람의 글을 클릭했다. 그러자 뜬금없이 “친추(친구 추가) 주세요~”라고 한다. 친구면 친구지 추가는 또 뭐여. 그제야 알았다. 동네를 같이 걷지만 실제로 이웃과 만나지는 않는, 게임 속 일종의 ‘원격 산책’이라는 것을.
“철수야, 앉아서 게임만 하지 말고 나가서 좀 걸어라!” “컴퓨터만 보면 건강도 안 좋아져~ 운동을 해야지. 넌 애가 누굴 닮아서 그러니?” 이런 엄마들 잔소리가 무색한 ‘신(新) 운동 게임’이 등장했다. 게임도 하고 건강도 챙기는 본격 걷기 장려 게임. “전설의 포켓몬을 수집하겠다”며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게 만든 ‘포켓몬 고’에 이어 걷거나 뛰거나 아무튼 몸을 움직여야만 게임 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워킹 게임’ ‘러닝 게임’ 혹은 ‘헬스 게임’이 속속 나오고 있다.
그중 걸음 수에 따라 꽃을 심으며 캐릭터를 수집할 수 있는 어느 산책 게임은 두 달 새 이용자 수가 1350%나 폭증할 만큼 인기다. 심지어 아들·딸과 함께 게임을 즐기는 젊은 엄마들도 늘고 있다는데. ‘아무튼, 주말‘이 직접 게임을 해보며 그 매력을 파헤쳤다.
◇같이 게임하며 2만보 걸어
지난 7일 오후 7시쯤, 서울 선릉역 인근. 퇴근한 동갑내기 직장인 김모(32)씨와 친구 장모(32)씨, 이모(32)씨가 꽃을 심으며(?)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언 땅을 진짜 삽으로 파서 심는 건 아니고 모바일 게임 ‘피크민 블룸’ 내에서 심는 것. 게임이지만 스마트폰 화면 속은 골목골목 실제 현실의 장소와 똑같이 구현돼 있다. 위치 정보 시스템(GPS)과 증강현실(AR) 등이 바탕이라서 가능한 일.
룰은 간단하다. 걷는다. 100보나 3000보, 1만보 등 걸음 수를 채운다. 식물을 닮은 다양한 캐릭터와 꽃잎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이 꽃잎을 또다시 걸으며 심어 주변에 꽃이 가득해지면 해당 장소에서만 나오는 엽서를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명동 거리를 걷는다면 명동성당 사진 붙은 엽서를 받는 식. 게임 내 친구를 만들면 미션(임무)을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다. 현실에서 만나 함께 걸을 필요는 없지만 “같이 다니면 의지가 덜 약해져 목표한 걸음 수를 채우기 쉽다”고 한다. 게임을 위해서만 걷는 거 아냐, 생각한다면 오산. 걷기를 위해 게임을 하기도 한다. 김씨는 “새해 목표를 건강으로 정했는데 날이 춥다 보니 너무 걷기 싫어 친구들과 게임을 시작했다”고.
게임 덕에 ‘걷기 크루’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게임 팬카페에서는 종종 단체 모임이 진행돼 “과천 서울대공원에 다 같이 모여 동물원 둘레길부터 호수까지 꽃을 심었다. 2만보 걸었다” 같은 후기가 올라온다. 수십 명이 스마트폰을 보며 함께 걷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어느 집회에는 ‘피크민 하는 사람들’ 문구가 적힌 깃발이 등장하기도 했다. 게임 속 유저들이 국회 근처에 바글바글 모여 경쾌하게 걷는 인증 사진이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다.
출시 3년이 넘도록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게임은 최근 두 달간 이용자가 135만명이나 늘었다. 데이터 플랫폼 기업 모바일 인덱스에 따르면 작년 5월까지 4만명대에 머물던 이용자 수가 그해 9월 10만193명으로, 11월 144만6791명으로 치솟았다. 걸그룹 뉴진스가 그 게임을 한다고 밝힌 데 더해 건강을 즐겁게 관리하는 ‘헬시 플레저’ 트렌드 영향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게임도 하고, 소통도 하고, 건강도 챙기고~.
◇소장욕 자극해 또 걷게 만들어
그러나 아무리 건강에 좋다 한들, 재미가 없다면 게으른 자의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법. 겨울 한복판에서 잦은 집콕과 폭식으로 살이 3㎏가량 오른 기자가 주말을 끼고 닷새 동안 게임을 해봤다. 그 결과 특별한 일 없이 쉬는 주말에 하루 평균 3000보에 불과하던 게으름뱅이의 걸음 수가 1만보를 넘겼다.
소장욕을 자극해 ‘걸을 동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걸어야만 획득 가능한 다른 색과 모양의 캐릭터 그리고 엽서. 다만 어딜 가든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걸으면서 계속 확인하게 된다는 게 단점이었다. 사고가 날 수 있으니 주의. 이용자가 야외를 돌아다니며 캐릭터를 모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게임 ‘포켓몬 고’도 비슷하다. 역시 증강현실을 기반으로 스마트폰을 현실의 장소 어딘가에 갖다대면 포켓몬이 가상의 공간에 나타나는 식.
2017년 포켓몬 고의 국내 출시 이후 “숨어 있는 희귀 포켓몬을 발견해야 한다”는 자녀들의 성화에 엄마들은 함께 산과 들을 헤매야 했다. 당시 “그래도 방구석에서 컴퓨터만 붙들고 있는 것보다 낫다” “그래도 애가 움직이긴 하니 운동은 된다” 등 엄마들 푸념이 맘카페를 점령했다. 피크민 블룸도 비슷하다. 인천 미추홀구에서 초등생 자녀 둘을 키우는 엄마 박정안(33)씨는 “큰아이가 게임하는 모습을 보고 작은 애 스마트폰에도 깔아줬다”며 “이참에 나도 같이 아이들과 게임을 하며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운동 같은 게임’ 혹은 ‘게임 같은 운동’은 늘어가고 있다. “게임 내 여덟 번째 관문인 ‘우천의 눈물’에서 80초 안에 소나기 고개 미션 어떻게 돌파하나요?” 대관절 무슨 말인지 영락없는 게임 관련 질문인데, 그에 대한 답변은 “제자리걸음으로 일단 걸은 다음 뛰세요”다. 던전 안의 괴물을 운동 동작으로 물리치며 나아가는 닌텐도 스위치의 ‘링피트’ 이야기다.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스쿼트)을 하며 몬스터에게 박치기를 하는 식.
게임을 실행하고 달리기 시작하면 뒤에서 좀비가 따라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혹은 작게 들리며 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모바일 게임 ‘좀비런’도 인기다. 자녀가 게임을 한다고 무조건 혼내는 게 아니라,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심사숙고한 뒤 야단 칠지 말지 결정해야 할 날이 오고 있다.
◇“인문학적 요소 강화될 것”
게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증강현실과 가상현실(VR), 사용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모션 인식 등의 기술이 발전하며 “어떤 종목이나 활동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느냐에 따라 재미 요소와 효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게임을 재활에 활용하는 예가 대표적이다. 전북 김제시 등 일부 보건소에서는 닌텐도 스위치 스포츠로 출시된 볼링·골프 등 7종의 게임을 지난해 3월부터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에 사용하고 있다. 무선 조종기(컨트롤러)를 들고 팔·다리 동작으로 모니터 화면 속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도록 하는 식.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IT 박람회 ‘CES 2025’에 참여한 스타트업 잼잼테라퓨틱스는 뇌병변 장애 아동을 위한 AR 재활 게임 ‘잼잼 400’을 내놔 주목받기도 했다.
작년 부산국제인공지능(AI) 영화제의 기술 자문을 맡은 김태희 영산대 게임VR학부 교수는 “가상현실 속에서 현실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인기 배경 중 하나”라며 “게임이나 가상현실 속 캐릭터에 AI가 접목돼 지능화되며 인문학적 요소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