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가정의 화장실은 거의 재래식 변소였다. 본채와 떨어진 변소는 어린 마음에 악취 가득한 혐오스러운 곳이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 변소 가는 일은 더 고역이었다. 서민들에겐 동네 목욕탕 가는 게 월례·연례행사이던 시절이다. 그 당시 공중목욕탕 욕탕엔 둥둥 떠다니는 때를 퍼 올리는 뜰채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세계 여행가 헤세-바르테크가 1894년 한양을 방문한다. 그의 묘사는 충격적이다. 한양은 일국의 수도에 전혀 걸맞지 않은 초라한 곳이었다. 거리 곳곳이 ‘인분(人糞)에 잠겨있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였다. 세계인이 동경하는 K 열풍의 초현대 도시 21세기 서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다.
한반도에 애정이 깊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 견문기도 별 차이가 없다.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집 밖에 내다 버린 분뇨가 말라붙은 한양 골목길 묘사가 생생하다. 워싱턴에 처음 파견된 조선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미국 관리와 선원들도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조선 왕조 귀족인 정사와 부사들의 악취와 이들이 선실에 남긴 이와 벼룩에 대해 불평하는 뒷얘기다.
하지만 서양 중세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른 문명의 더러움을 조롱할 때 ‘평생 세 번 씻는다’(탄생, 결혼, 죽음)고 비웃곤 하는데 사실 이는 중세 유럽인의 일상이었다. 목욕을 즐기고 수세식 화장실까지 사용한 고대 로마와 비교하면 흑사병 유행 이후 유럽 중세는 거대한 퇴행이었다. 당시 유럽인은 씻기를 싫어하는 차원을 넘어 물과 접촉하는 것을 건강상 치명적 위협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르장 후작이라는 귀족은 너무 오랫동안 속옷을 갈아입지 않아 ‘속옷과 함께 피부 조각도 벗겨질’ 정도였다. 여성들도 비슷했다. 아메리카 대륙에 온 유럽인들의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인디언들이 진절머리 칠 정도였다. 이런 사회에서 인분을 어떻게 취급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런던 같은 대도시 거리 곳곳이 ‘똥이 넘쳐있는’ 상태였고, 모든 오물이 합쳐진 ‘액체로 된 거름의 홍수’였던 템스강은 전염병 창궐 원인이 되곤 했다.
‘방이 수천 개인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속설은 빌 브라이슨에 의하면 사실이 아니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 베르사유는 오히려 ‘화장실 100개와 변기 300개’를 갖춘 최첨단 시설이었다. 하지만 상주 인구에 더해 궁전을 찾는 수많은 귀족과 하인에겐 태부족이어서 궁전 으슥한 곳과 계단, 복도엔 대변이 뭉텅이로 쌓여 있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배설물을 치우라는 왕의 칙령이 나올 정도였다.
‘향기롭지 못한 얘기’를 길게 한 이유가 있다. 서양인들 조선 여행기는 한양의 ‘끔찍한 위생 상태’를 두루 거론한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근대적 위생 수준을 갖춘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류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기생충과 해충에서 벗어난 것은 비교적 근래 일이다.
수세식 화장실을 비판하는 생태 운동이 있다. 대도시가 날마다 배출하는 대량의 인분을 재활용하는 문제는 현대 문명의 난제다. 그럼에도 우리는 쾌적한 수세식 화장실을 당연시하고 칸막이 없는 자연 상태인 후진국의 변소에 충격과 공포에 빠지곤 한다. 오늘날 우린 매일 온수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잘 안 먹어도 몇 주간 살 수 있지만 배설하지 않으면 며칠 안에 죽는다는 몸의 엄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인류 생활사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피땀으로 쌓아 올린 ‘인위적’ 문명의 성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금도 세계 수십 억 인구가 수세식 화장실이 없다. ‘세상이 갈수록 엉망이 되어간다’는 세론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이 아무리 힘겨워도 우리네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화장실의 진화가 증명하는 명쾌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