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에~탁! 세에~탁!”

서울 응봉동 신동아 아파트에서는 아침마다 정겨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동네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수거하기 위해 돌아다니며 내는 신호. 동네도, 주인도 다르지만 첫 글자인 ‘세’를 길게 늘어뜨리고 뒷글자인 ‘탁’을 스타카토로 짧게 끊어 강조하는 “세에~탁!”은 전국 공통이다. “세에~탁!”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고 또 아득해지는 걸 들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든다.

서울 응봉동에서 30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이상재 사장이 스팀다리미로 코듀로이 바지를 다리고 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4월은 세탁업계의 성수기. 10평 남짓한 공간에 패딩 잠바와 스웨터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응봉동에서 30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이상재 사장이 스팀다리미로 코듀로이 바지를 다리고 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4월은 세탁업계의 성수기. 10평 남짓한 공간에 패딩 잠바와 스웨터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4월은 세탁 업계의 성수기. 꽃샘추위도 끝나고 패딩과 코트를 옷장에 집어넣으려면 세탁소에 맡겨야 한다. 그런데 요즘 이 “세에~탁!” 소리를 찾아 다니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공장형 프랜차이즈 세탁소와 온라인 서비스가 장악한 시대에 나타난 반작용일까. 세탁소 소비자들 사이에 부는 레트로(복고) 열풍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돈값 못 하는 세탁?

동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역 맘 카페와 입주민 단톡방마다 ‘세탁소 괴담’이 공유된다. “프랜차이즈 세탁소에 갔더니 ‘로고가 지워질 수 있다’ ‘장식물이 사라지면 못 찾을 수 있다’ 같은 문구에 동의를 요구하더라고요. 대량으로 세탁하지 않는 동네 세탁소 혹시 아시나요?” “패딩 3개 맡겼더니 40만원 가까이 불렀습니다. 옷을 하나 사는 게 낫겠어요”....

이런 괴담에 간담이 서늘해진 소비자들이 찾은 대안은 동네 세탁소다. 과거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던 소규모 개인 세탁소를 뜻한다.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공장형 프랜차이즈가 시장을 점령한 상황에서 작은 세탁소 안에 드라이클리닝 기계와 세탁실 등을 갖추고 돋보기안경 낀 사장님이 미싱 돌려 수선해주는 개인 세탁소가 인기 역주행 중인 것이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코인 빨래방에서 건조기가 작동되고 있다. /뉴스1
경기도 고양시의 한 코인 빨래방에서 건조기가 작동되고 있다. /뉴스1

규격화·자동화를 내세운 프랜차이즈 세탁소 대신 동네 세탁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 까닭은 ‘등골 브레이커(부모 등골이 휠 정도로 부담이 가는 고가 제품)’ 의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 벌에 수십만~수백만원대 패딩 점퍼와 코트는 세탁할 때도 비싼 대우를 받는다. 1만원 초반대부터 시작하는 오리털 점퍼 세탁 가격은 ‘명품’이라는 말이 붙으면 가격이 5배로 뛴다. 모자에 복슬복슬 털이라도 붙어 있으면 추가 금액이 붙는다. 겨울철 내내 돌려 입던 외투 두세 벌만 맡겨도 20만원 가까운 금액에 손이 덜덜덜. 가격표에 적힌 ‘브랜드 로고 같은 장식품은 떼어내 보관하라’ ‘원부자재 불량으로 인한 탈색·변형·파손 등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경고를 보면 마음이 찝찝해진다.

비싼 돈에 못 미치는 결과에 분쟁도 늘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022년 1월부터 작년 9월까지 접수된 세탁 서비스 관련 심의는 3875건. 4건 중 1건은 ‘세탁 사업자의 과실’로 인한 것이었다. 세탁 방법이 잘못돼 옷이 망가지거나 색이 빠진 경우가 가장 많았고, 세탁 후 손질이 미흡하거나 얼룩 등 오점이 제거되지 않은 게 뒤를 이었다. 눈에 띄는 건 공장형 프랜차이즈 세탁소와 분쟁이 많다는 점. 접수된 심의의 절반이 대형 사업자 10곳에서 발생했다.

세탁물 피해예방을 위해 소비자가 알아야 할 사항. /뉴시스
세탁물 피해예방을 위해 소비자가 알아야 할 사항. /뉴시스

소비자들은 추억 속 동네 세탁소를 대안으로 찾는다. 옷에 달린 장식품이 사라졌다면 사장님한테 얘기해 세탁기 문을 열어보면 되고, 어느 동네에서 왔을지 모르는 옷들이 대형 세탁기에서 함께 뒤섞여 돌아가지 않는 곳. 맘카페와 입주민 단톡방에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네 세탁소 리스트’가 공유되는 이유다.

◇단골 세탁소의 힘

지난 15일 서울 응봉동 신동아 세탁소. 33㎡(약 10평) 남짓한 공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빼곡히 옷이 걸린 옷걸이들 위 천장에는 세탁을 마쳐 말끔해진 운동화와 점퍼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입구에서는 커다란 드라이클리닝 기계가 웅웅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다림질을 할 때마다 뿌연 증기가 가게 안을 채웠다. 이곳에서 30년간 세탁소를 운영해 온 이상재(60) 사장은 매일 아침 434가구가 거주하는 이 아파트 단지를 돌며 세탁물을 수거한다. “세에~탁!” 소리로는 명창 저리 가라다.

오후 3시쯤 한 손님이 가게에 들어서자 이 사장은 맡긴 물건을 묻지도, 옷마다 붙여둔 꼬리표를 보지도 않고 다림질된 바지를 건넸다. 이 묵언의 거래를 궁금해하자 “다 단골손님인데 모를 게 뭐 있느냐”고 답했다. 입구에는 집집마다 내놓은 패딩 점퍼와 코트, 스웨터 등이 높게 쌓여 있었다. 돌돌이 테이프로 코듀로이 바지에 붙은 먼지를 제거하던 그는 연신 손으로 바지를 쓸어내리며 “이렇게 해야 주름 사이에 낀 작은 먼지들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세탁소 안쪽에 있는 손세탁실 벽에는 와인·주스·꿀물 같은 식물성 얼룩 빼는 법, 노란 얼룩과 붉은색 얼룩에 쓰는 세제의 종류, 오염 원인에 따른 세탁법 등을 적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서울 응봉동에서 30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이상재 사장이 스팀다리미로 세탁물을 다리고 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4월은 세탁업계의 성수기. 10평 남짓한 공간에 패딩 잠바와 스웨터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하루 50~60벌의 세탁물이 접수된다는 이 세탁소는 숨은 고수의 영업장으로 소문을 타며 인근 금호동, 행당동은 물론, 다리 건너 압구정동에서도 세탁물을 이고 지고 온다. 양복 입고 운전하는 직업을 가진 고객은 안전벨트 매는 왼쪽 어깨 부분이 쉽게 해지니 잘 살피고, 컴퓨터 많이 하는 고객은 손목 끝단에 수선할 게 없는지 확인한다. 공장형 프랜차이즈 세탁소가 제공하지 않는 간단한 수선과 맞춤형 케어가 동네 세탁소의 장점.

1995년 연 이 작은 세탁소에서 3남매를 거뜬히 키워냈지만 매출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그는 “공장형 프랜차이즈 세탁소의 장점도 있겠지만 공장에서 옷을 틀에 넣고 고압 바람을 불어넣는 세탁을 자주 하면서 안감이 뜯어지거나 옷이 뒤틀리는 경우가 많으니 손님들도 잘 살펴보며 입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세탁 아저씨 대신 앱을 쓴다

옷의 주름을 펴기 위해 다듬이질하며 시작된 국내 세탁업은 가내수공업에서 공장화, 자동화까지 발전해 왔다. 국내 최고(最古) 세탁소는 1914년 영업을 시작한 조선호텔 세탁실. 청와대 세탁물과 국내 이름난 재벌집 옷까지 세탁하며 100년 넘게 영업했다. 30년간 세탁 업무를 담당해 온 황경자(56) 지배인은 “섬유 염색 기능이 발달한 우리나라 제품들과 달리 이태리제로 불리는 명품들은 염색 농도가 약해 이염이 쉽게 된다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직원이 43명에 달한 대규모 세탁소였지만 2018년부터 투숙객과 피트니스 센터 회원의 세탁물만 취급하는 호텔 내 세탁실로 범위를 좁혔다.

1910년대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호텔 세탁소 모습. 가장 오래된 세탁소로 알려진 이곳은 2018년까지 청와대와 재벌집 세탁물을 담당했다. /조선호텔 제공

동네 세탁소의 전성기는 1990년대다. 경제성장에 따른 업무량 증가로 ‘주부 사원 모집’ 플래카드가 나붙던 시절.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동네마다 세탁과 수선, 다림질을 해주는 세탁소가 들어섰다. 아파트에 몰려 사는 거주 형태가 보편화하면서 세탁소 사장들이 아파트 복도를 돌며 세탁물을 수거하고 배달해주는 영업 방식이 일반화됐다.

세탁소 시장은 1992년 ‘세탁소 편의점’을 표방하는 크린토피아가 등장하며 지각변동을 겪는다. ‘와이셔츠 1장당 500원’ 세탁 서비스를 내세우며 등장한 크린토피아는 2008년 가맹점 1000개를 돌파하며 동네 세탁소의 지위를 빼앗았다. 저렴한 가격과 함께 이불 세탁 서비스, 운동화 세탁 서비스 등으로 세를 불린 이 업체는 올해 1분기 말 기준 가맹점만 2800여 개로 세탁 업계 1위. 크린에이드, 월드클리닝 같은 후속 브랜드들이 생기며 문을 닫는 동네 세탁소가 늘었다.

서울시내 한 재활용센터에서 주민이 재활용품으로 수거된 중고 세탁기를살펴보고 있다./조선DB

집집마다 있던 세탁기가 할 일을 잃는 시대는 2010년대 후반 개막했다. 드라이클리닝과 다림질 위주 세탁 서비스가 ‘집안일’이라 불리던 빨래까지 집어삼킨 것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세탁기 놓는 공간조차 비용처럼 느껴지는 시대, 1~2인 가구는 세탁기 대신 ‘무인 세탁방’에서 빨래를 한다. 코로나19 이후 등장한 세탁특공대·런드리고 같은 온라인·비대면 세탁 업체들은 문 앞에 둔 옷을 수거해 간 뒤 배송해주는 서비스로 호응을 얻었다.

◇늙고 귀해진 동네 세탁소

세탁의 복고 열풍이라고는 하지만 동네 세탁소는 확연히 줄어드는 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전국 2만9512개였던 세탁소는 10년 만인 작년 1만9739개로 1만개가량 감소했다. 요즘에는 스타일러·에어드레서 같은 의류 관리기가 혼수품 명단에 오르면서 집에서 간단한 스타일링과 탈취·항균 등을 하는 경우도 늘었다. 세탁도 셀프가 된 것이다.

LG전자 스타일러 /LG전자

세탁의 외주화와 세탁의 셀프화가 동시에 이뤄지는 시대에 거꾸로 찬란히 빛나고 있는 동네 세탁소는 결국 추억의 이름이 될 공산이 크다. 김학우 한국세탁업중앙회 회장은 “세탁업 경영주의 연령대도 젊은 층의 신규 유입이 거의 없고, 고령화하여 60~70대 이상이 90%로 전락했다”며 “이것이 우리 업의 현실”이라고 했다. “세에~탁! 세에~탁!” 소리는 점점 드물고 귀하게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