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의 한 게이트 앞에 행선지가 '알 수 없는 솅겐(EU 솅겐 조약으로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지역)'으로 표시된 전광판. 스칸디나비아항공이 승객과 승무원들에게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띄운 특별기다. 승객들은 스페인 세비야에 착륙했다고. /인스타그램
지난 4일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의 한 게이트 앞에 행선지가 '알 수 없는 솅겐(EU 솅겐 조약으로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지역)'으로 표시된 전광판. 스칸디나비아항공이 승객과 승무원들에게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띄운 특별기다. 승객들은 스페인 세비야에 착륙했다고. /인스타그램

“여권 챙겨 시간 맞춰 공항으로 오세요. 목적지는 비밀입니다.”

이것은 007 작전인가, 납치극인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비행기를 타라니. 그런데 이런 ‘미스터리 여행’이 해외에서 유행 중이다. 내놓는 족족 완판이다.

이달 초 덴마크 스칸디나비아항공(SAS) 국적기가 코펜하겐을 이륙해 ‘유럽 내 미상의 목적지(Unknown Schengen)’로 출발했다. 왕복 티켓은 4분 만에 동났다. 승객은 물론 기장단을 제외한 승무원들도 도착지를 몰랐다.

착륙해보니 스페인의 중세 도시 세비야. 여행객들이 소셜미디어에 후기를 쏟아냈는데, 3박4일의 세비야 관광보다는 ‘공항과 기내에서 얼마나 설레고 흥분됐는지’가 주를 이뤘다.

이달 초 스칸디나비아항공의 '목적지 미상' 비행기를 타고 들뜬 승객들. /인스타그램
이달 초 스칸디나비아항공의 '목적지 미상' 비행기를 타고 들뜬 승객들. /인스타그램

SAS가 지난해 이 항공권을 처음 출시했을 때도 180명 모집에 6000명이 몰렸다. 승객들은 “섭씨 20도의 기후에 대비, 수영복을 가져오라”는 힌트만 받았다. 당시 행선지는 그리스 아테네였다.

왜 이런 항공권을 팔까. SAS 측은 “과거 여행은 모험이었지만 지금은 고르기 까다로운 상품이 됐습니다. 미지를 탐험하는 기쁨을 돌려 드리겠습니다”고 했다. 이 항공사는 그 ‘기쁨’을 장기 회원이 보유한 자사(自社) 마일리지로만 구매하게 했다.

서구에선 이런 미스터리 여행이 최근 수년 새 상설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작은 코로나 팬데믹 당시 땅에 서 있는 비행기에 올라 기내식 먹고 영화 보며 몇 시간을 보낸 뒤 내리는 상품이 각국에서 인기를 끈 것. 여행업계는 사람들이 특정 여행지만큼이나, 그저 어디론가 떠난다는 설렘 자체를 갈망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유럽 저가 항공사 위즈에어는 목적지 불명의 항공숙박 패키지 '길을 잃자(Let's Get Lost)'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영국 런던 개트윅 공항에서 미스터리 항공권을 들고 기내에 오른 승객의 사진. /인스타그램
유럽 저가 항공사 위즈에어는 목적지 불명의 항공숙박 패키지 '길을 잃자(Let's Get Lost)'로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영국 런던 개트윅 공항에서 미스터리 항공권을 들고 기내에 오른 승객의 사진. /인스타그램

이는 ‘여행지는 어디든 상관없다’는 인식에 닿았다. 먼저 헝가리 저가 항공사 위즈 에어가 유럽 각지와 중동에서 ‘길을 잃자(Let’s Get Lost)’란 이름의 목적지 불명 항공숙박권으로 히트를 쳤다.

독일 루프트한자의 ‘루프트한자 서프라이즈’도 있다. ‘햇빛 찬란한’ ‘쇼핑 성지’ ‘동쪽 어디든’ ‘연인들을 위한’처럼 여행 콘셉트만 선택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유럽 어디로든 실어날라 준다.

호주 콴타스항공은 시드니·멜버른·브리즈번 3개 도시에서 국내 모처로 떠나는 항공편을 매일 띄운다. 미국에서도 여러 여행사가 전세기를 이용한 비정기 미스터리 국내선 여행객을 모객한다.

내용물을 모르는 상품을 사고파는 시장은 원래 있었다. 화장품, 책, 완구나 굿즈, 식품 등 소비재를 상자에 무작위로 담아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파는 럭키 박스(lucky box)나 블라인드 박스(blind box)가 그것. 검증된 기업 브랜드와 큐레이션(curation·정보를 선별해 제시하는 일) 능력, 그걸 믿는 충성 고객이 있어야 가능한 마케팅이다.

지난해 아일랜드 더블린 공항의 전광판에 국적기 에어링구스의 목적지 미상 '미스터리 플라이트' 안내가 떠있다. /X

미스터리 여행도 같은 맥락이다. 비행기로 날아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며칠을 보내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어본 여행자라면 감수할 만하다.

사람들은 휴가 전 여행지·교통편·숙소·볼거리를 알아보려 평균 141개의 웹페이지를 검색한다고 한다.

수많은 선택지 탓에 오히려 결정이 어려워지거나, 이미 한 선택을 후회하거나, 막상 여행지에 가선 미리 알아본 상황과 달라 실망하기도 한다. 선택의 자유가 불만을 낳는 ‘선택의 역설’이다.

지난 설 연휴 인천국제공항 출국장 모습. 당시 임시공휴일 지정 등의 효과로 200만명 이상이 출국해 연휴를 해외에서 즐겼다. /뉴시스

미스터리 여행은 모험가, 일정 짤 시간이 없는 이들, 특별한 날 깜짝 선물을 하고 싶은 이들, 순간의 경험에 몰두하고 싶은 이들에게 잘 맞는다고 한다.

반면 지난해 스칸디나비아항공을 타고 아테네에 다녀온 한 여행 작가는 “솔직히 목적지를 알게 되는 순간까지의 흥분 외엔, 여행의 지속 가능한 효용은 작았다”며 “호불호 강한 여행자에겐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미스터리 여행은 목적지의 비자 문제가 없는 EU 역내와 호주·미국 등 땅 넓은 나라의 국내선 여행에서만 나왔다. 한국엔 없는 상품. 우리야 뭐… 나라와 국민 전체가 목적지 미상의 미스터리 여행을 하는 중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