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정당 후보들의 대통령 집무실 공약들이 난무한다. ‘실패한 땅’ 용산을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할까? 요즘 필자가 머무는 순창의 시골 밤, 물 고인 논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처럼 들린다. 미래 세계 강국을 염두에 둔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표심을 염두에 둔 발언들이라 시끄럽기만 하고 진중한 메시지는 없다.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 당시 신행정건설추진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전북혁신도시, 경상북도 도청 이전 등 공공기관 입지 선정 과정에서도 공식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강원도 도청사 건립 자문위원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20년 넘게 도시 입지론과 도읍지론을 깊이 천착했다.
국력이 강해짐에 비례하여 ‘산간 지역(사대문 안: 청와대)에서 평지(한강을 접한 용산과 마포)로 그리고 바닷가로 도읍지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 전통 풍수관이다. 동아시아 풍수만의 주장이 아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특정 민족의 유형과 성격은 그 지리적 위치의 자연 유형(Naturtypus)에 따라 규정된다”고 하였다(‘역사철학‘). 이러한 자연 유형은 3가지로 분류된다. 고원(초원) 지대, 평야 지대, 해안 지대가 그것이다. 헤겔은 이 가운데 해안 지대만이 무역을 발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한한 정복욕·모험심·용기·지혜 등을 심어주어 궁극적으로 국민(시민)의 자유를 자각하게 해준다고 하였다. 국가의 주요 활동 무대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 및 시민의 자유의식이 규정된다는 주장이다.

19세기 말 독일 지리학자 라첼 역시 바다는 해양 민족의 대담성과 거시적 안목을 심어준다고 했다. 자본주의 발달 이후 유럽에서는 경쟁적으로 패권국이 바뀌었다.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 등이 한때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패권을 추구했던 프랑스만은 끝내 제국을 이루지 못했다. 해양 국가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양 국가를 지향할 때 패권국이 될 수 있음을 역사는 가르친다. 특히 한 나라의 수도가 분지에 있는가, 해안에 있는가는 나라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이웃 국가에서 성공 사례를 볼 수 있다. 무인 정권(幕府)의 최고 실력자(쇼군·將軍)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후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지금의 도쿄)를 근거지로 삼았다. 모두 바닷가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천도를 고민했다. 후보지로서 기존의 교토·오사카·에도 등이 논의됐다. 이때 정치인 마에지마 히소카, 산조 사네토미 등은 ‘수운(水運)의 장래성, 뛰어난 지세(地勢), 국운의 흥성’ 등을 이유로 에도(도쿄)를 관철한다. 오사카도 훌륭한 항구 도시지만 큰 배가 드나들기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세계화‘를 염두에 둔 천도였다. 그리고 성공했다.

지금 우리의 수도는 어떠한가? 포화 상태가 된 서울이 과연 세계 제국 수도가 될 수 있을까? 세종시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민주당 이재명 대선 예비 후보는 “충청은 국토 중심이자 대한민국 심장으로, 대한민국 균형 발전의 심장 충청을 행정·과학 수도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또 당내 대선 후보들과의 토론에서 “임기 내 국회 세종의사당과 대통령 세종집무실을 건립하겠다”고도 했다. 충청도와 세종시에 분명 좋은 일이다. 세종시는 정치·행정·교육·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전국의 자본과 인재가 몰려들 것이다. 동시에 인근 지역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된다. 이른바 ‘균형 발전의 역설‘이란 함정에 빠진다. 충북 옥천·영동, 충남 공주·논산·계룡, 전북 무주·진안·장수, 경북 김천·성주 등 지자체들이 긴장해야 할 이유다.
2003년 당시 필자는 세종시 수도 이전론이 옳다고 믿었다. 그때는 옳았으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세종시가 세계 제국의 수도가 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수도는 단순한 정치적·행정적 결정이 아닌, 국운을 좌우하는 문명사적 결정이어야 한다. 정당과 대선 후보의 즉흥적 전략이 아닌,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