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접종용 독감 백신이 유통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된 정황이 확인되면서 22일부터 예정됐던 독감 백신접종사업이 2주간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냉장 보관 상태로 운송되어야 할 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되면 효능이 떨어져 ‘물 백신’이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의료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국가접종용 독감백신 유통을 맡은 의약품 유통 업체 신성약품이 백신을 아이스박스가 아닌 종이 상자로 납품했다는 경험담이 쏟아졌다. 독감 백신이 든 상자 일부는 운송 과정에서 땅바닥에 그대로 놓여 지열에 노출된 정황도 확인됐다.
질병관리청 조사에서 부실 유통된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최종 확인될 경우 올해 국가접종용 독감백신 1259만명분 중 최대 500만분이 그대로 폐기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신성약품도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진문 신성약품 회장은 22일 밤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용역을 준 백신 유통 업체가 운송하는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었다”며 유통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있었던 점을 인정했다. 김 회장은 “국민께 송구하고 질병관리청의 조사와 향후 대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Q: 신성약품이 올해 처음 백신 유통을 맡아 미숙함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김진문 회장(이하 ‘김’): 올해 처음 국가접종용 백신 유통을 맡게 된 건 처음이 맞는다. 하지만 이전에도 백신 제조사에서 병원으로 백신 민간 유통 사업을 했었다. 물론 이번처럼 1000만명이 넘는 대규모 물량을 맡은 건 처음이다.
Q: 그간 공공 물량을 유통하지 않다가 올해 갑자기 입찰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뭔가?
김: 이때까지 백신 공공 물량은 우리보다 규모가 작은 백신 유통 업체들이 맡았다. 그런데 지난해 이들 업체가 입찰 담합 등에 연루되면서 올해 입찰에 제대로 참여할 사정이 안 됐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로 올해 독감백신 국가 접종 사업의 물량이 늘었다. 그래서 우리처럼 규모가 큰 업체가 맡아도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Q: 일각에서는 “신성약품이 고위 정치권으로부터 향후 공공물량의 백신 유통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이번 유통 사업 입찰에 뛰어든 게 아니냐”는 설이 돈다. 청와대 수석 A씨와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얘기도 있다.
김: 꿈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근거 없는 소문이고 황당한 얘기다. 사실무근이다. A씨와 같은 대학 출신이고 대학 동문회에서 같이 활동해 친분이 있는 것 사실이다. 하지만 사업적 얘기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Q: 신성약품이 규정과 달리 백신을 아이스박스가 아닌 종이 상자에 담아 병원에 납품했다는 제보들이 잇따르고 있다.
김: 오해가 있다. 백신 제조사에서 우리 업체로 백신 수 만병이 올 때도 종이박스 형태로 배달된다. 2~8도로 유지되는 냉장차로 운송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우리가 종이박스로 납품한 것도 냉장차에 담아서 배달했고, 병원에 도착해서도 냉매가 든 캐리어에 담아서 의료진에 바로 전달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노출되는 건 문제가 안 된다. 냉장차가 아닌 일반 트럭으로 운반할 때는 아이스박스에 냉매를 넣어 적정 온도를 유지해서 납품했다.
Q. 백신이 든 상자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트럭에 옮겨 싣는 문제가 있었다는데.
김: 사실이다. 용역을 준 백신 유통 업체들이 일부 그런 실수를 했다. 가령 서울에서 광주로 백신을 납품한다고 하면 11톤짜리 대형 냉장트럭에 전주에 가는 물량까지 한꺼번에 실어서 내려간다. 전주에 가면 (용역업체의) 1톤짜리 냉장 트럭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대형 트럭에서 물량을 나눠 받고, 대형 트럭은 다시 광주로 가서 물량을 또 배분하는 식이다. 이렇게 대형트럭에서 소형트럭으로 옮길 때 백신이 지열에 노출되지 않도록 땅바닥에 팔레트를 두고 그 위에 백신을 두는 식으로 옮겨야 한다. 그런데 일부 업체가 땅바닥에 그대로 백신 상자를 두거나 냉장차 문이 열려있거나 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Q. 여러 유통업체가 이번 납품에 참여한 건가?
김: 그렇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물량을 납품하려면 차량이 100대 이상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차량을 그 정도로 직접 보유하고 있지 않다.
Q, 용역계약을 할 때 운송 규정을 지키도록 하고 위반 시 책임을 묻는 조항 같은 건 없었나?
김: 계약서에 운반 시 2~8도를 유지하는 규정을 지키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조항도 있다. 하지만 용역업체에 책임을 묻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야 했다. 국민께 송구하다. 질병관리청의 조사에 성실히 임하고 향후 대책 마련에도 성실히 임하겠다. 아무쪼록 납품된 백신들이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돼 백신 접종이 그나마 차질없이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