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만명분 백신이 상온이나 영하에 노출됐고, 61만명분 백신에서 백색 침전물이 발견된 데 이어, 세 명이 백신 접종 직후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질병관리청과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보건 당국의 부실한 대응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인천의 18세 고등학생이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접종 이틀 만인 16일 사망한 데 이어, 전북 고창의 78세 여성과 대전의 83세 남성 등 닷새간 모두 세 명이 백신 접종 직후 숨졌다.
◇닷새간 세 명이 백신 접종 직후 사망
20일 질병관리청과 전라북도에 따르면, 19일 오전 9시쯤 전북 고창군 상하면 동네 의원에서 독감 백신을 맞은 78세 여성이 20일 오전 7시쯤 숨진 채 이웃 주민에게 발견됐다. 고혈압과 당뇨 등 기저 질환이 있었다고 보건 당국은 전했다. 대전에서도 20일 오전 10시쯤 백신을 맞은 83세 남성이 같은 날 오후 3시쯤 숨졌다. 유족들에 따르면, 이 남성은 10년 전에 대장암과 위암 수술을 받은 적이 있지만 최근에는 특별한 기저 질환이 없었다고 한다.
두 사례 모두 14일 백신을 맞고 16일 숨진 인천의 고등학생과 마찬가지로 상온에 노출됐거나 백색 입자가 발견돼 회수된 백신을 접종한 경우는 아니라고 보건 당국은 전했다.
보건 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을 거쳐 세 사망자의 사망과 백신 접종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 판단할 방침이다. 부검으로 사망 원인을 밝히기까지 일주일쯤 걸릴 것으로 의료계는 보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독감 백신 접종을 받고 숨져 정부 피해 보상을 받은 경우는 2009년 한 차례 있었다. 백신 접종 후 팔다리 근육이 약해진 데다 폐렴까지 겹쳐 숨지자 백신 접종과 사망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감 백신 맞아도 돼요?" 불안 확산
이날 오후 3시 찾은 서울 영등포구의 한 동네 의원 간호사는 “어제(19일)만 해도 백신 접종자로 대기 줄이 복도까지 이어졌는데, 오늘은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 빼고는 환자가 별로 없다”고 했다. 강서구의 한 의원은 “어제는 70대, 80대들이 몰려들어 반나절 만에 하루 물량이 소진됐는데 오늘은 절반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도 “독감 걸릴까 봐 백신 맞았다가 사망이라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맞구나” “하루 지나서 또 사망이라니 진짜 불안하네” 같은 글이 올라오고 있다.
◇질병청, 늑장에 불투명한 정보 공개
질병관리청의 늑장 공개와 불투명한 정보 공개도 국민 불안감을 키우는 대목이다. 질병관리청은 지난 16일 인천 고등학생이 사망한 지 사흘 만인 지난 19일 사망 사실을 발표했고, 이틀째 이 학생이 맞은 백신 제조사에 대해 "추후 공개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만 전라북도는 이날 숨진 채 발견된 78세 여성이 맞은 백신 제조사(보령바이오파마)와 제조번호(A14720016)를 공개했다. 대전시도 83세 남성이 맞은 백신 제조사가 한국백신이라고 밝혔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양모(39)씨는 “사망 원인 규명에 시간이 걸린다면, 사망한 접종자가 맞은 백신 제조 업체라도 알려줘야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국민이 안심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코로나 사태로 질병관리청 조직이 커졌는데도 상온 노출, 백색 입자 발견, 접종 후 사망 사례 발생 등 사고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며 “코로나와 독감이 동시에 유행하는 트윈데믹 우려로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을 가져야 할 때 빠르고 투명한 공개라는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했다. 마상혁 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백신 총괄은 질병청이고 유통 지침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마련하고 책임은 상온 노출 백신 유통사인 신성약품이 지란 것도 코미디”라며 “백신이 생산돼서 운송되고 접종될 때까지 책임을 한 기관에서 지는 컨트롤타워가 없다”고 했다.
질병관리청은 이날 “(인천 사망자와) 동일한 제조번호 백신을 맞은 사례들 중 중증 이상 반응이 없었던 점, 현재까지 확인된 부검 진행 중 받은 구두 소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인플루엔자 국가예방접종 사업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날 “백신 접종과 사망 간 관련성은 적을 것 같아 보이지만 사인은 미상”이라는 1차 구두 소견을 질병관리청에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