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주일간 28명(22일 오후 8시 기준)이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을 맞고 사망한 가운데, 제조번호가 같은 백신을 맞고 사망한 경우가 처음 확인됐다. 같은 백신 공장에서 같은 날 생산된 백신을 맞고 사망했다는 뜻이다. 제조 과정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2일 “같은 제조번호의 백신을 맞은 사람이 두 명 이상 사망할 경우 해당 제조번호 백신을 폐기하겠다”고 한 이후 이런 사실이 확인됐다.

28명의 백신 접종 후 사망자 가운데 두 명은 동일한 제조번호(로트번호)로 생산된 백신을 맞았고 또 다른 두 명도 이런 경우로 나타났다. 방역 당국은 당초 동일 제조번호로 인한 접종 후 사망자가 2명 이상이면 해당 백신 접종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날 질병관리청이 확인한 동일 백신 접종자는 최소 7만명분이고 한 제조번호의 백신 생산량이 15만명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30만명분 이상에서 방역 당국이 심각한 문제를 인정하는 백신이 확인돼 논란이 예상된다. 질병관리청은 23일 전문가 위원회를 열고 향후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날 국내 최대 의사단체인 대한의사협회와 일부 전문가는 “백신의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독감 예방접종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하지만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국회 국감에서 “예방접종을 중단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며 “23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간 모든 예방접종을 유보할 것을 정부에 권고한다”고 밝혔다.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종합감사에 참석한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잠시 안경을 만지고 있다. 최근 전국에서 독감 백신 접종 후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백신의 안전성이 규명될 때까지 접종을 중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정 청장은 이날 “현재까진 접종과 사망 사이 직접적 연관성이 낮아 독감 백신 접종 사업을 중단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국회사진기자단

‘11·22번째 사망자 백신’ 7만명 맞아... 정은경, 폐기하나

22일 동일 로트번호(제조번호)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을 맞은 사망자 2쌍이 확인되면서 정부가 해당 제조번호 백신 사용 중단 여부를 23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22일 하루 독감 백신 접종 후 숨진 사람은 18명 더 신고돼 28명(22일 오후 8시 기준)이 됐다. 독감 백신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복수 사망자 나온 백신 회수하나

질병관리청이 22일 오후 공개한 사망자 현황에 따르면 25명의 사망자 가운데 11·22번째(스카이셀플루4가 제조번호 Q022048), 13·15번째(스카이셀플루4가 제조번호 Q022049) 사망자가 같은 제조번호의 백신을 접종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제조번호는 단일 생산자가 동일한 조건에서 제조·조립해 동일한 특성을 갖는 제품군에 부여하는 고유번호다. 백신은 제조사마다 다르지만 약 10~15만개 정도가 한 제품번호로 묶인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이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같은 제조번호 백신에서 추가 사망자가 확인되면 해당 백신은 사용을 중단할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 이후 동일 제조번호 백신 추가 사망자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면서 정부가 과연 해당 백신 사용을 중단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보건 당국은 23일 예방접종 피해조사반회의를 열고 전문가들과 앞으로 대응 방향을 검토하기로 했는데 정 청장 국감 발언대로라면 해당 제조번호 백신에 대한 사용 중단 조치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11·22번째 사망자가 나온 제조번호 백신은 최소 7만4351명이 접종했다. 13·15번째 사망자와 같은 제조번호 백신 접종자 수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사용 중단 조처를 내리더라도 이미 접종한 사람이 15만명에 달할 전망이고, 문제가 되는 백신의 생산량이 최소 30만명분 이상일 것으로 보여 큰 파문이 예상된다.

다만 질병청 관계자는 “사망 신고자가 늘면서 우연히 사망자가 같은 제조번호의 백신을 맞은 사람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명씩 2쌍이 나온 것인데 만약 해당 백신에 문제가 있었다면 더 많은 사망 의심 신고가 들어왔을 것이라 보인다. 두 건의 사례만 가지고 해당 백신이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날 국내 최대 의사단체인 대한의사협회와 일부 전문가는 “백신의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독감 예방접종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전국 병의원 3만5000곳에 권고했다. 상당 의료기관이 23일부터 29일까지 독감 예방접종을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

또 2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보건소는 지자체로는 처음으로 관내 의료기관에 해당 백신의 사용을 보류해달라고 권고했다. 정부는 현 상황에서 예방접종 중단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지자체 차원에서 접종 중단 권고를 한 것이다

◇전문가들 “백신 자체 문제 있을 가능성 작아”

한편 22일 질병관리청이 정보를 공개한 25명의 백신 관련 사망 의심 사례를 보면 21명이 70세 이상으로 확인됐다. 보건 당국과 전문가들은 백신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은 작다는 입장이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창원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은 “국내에서 하루 50여명 정도가 돌연사하는데 최근 들어 국내 ‘돌연사(급성 심장정지로 인한 사망)’ 사례들이 사망 전 백신을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신고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다”며 “백신 자체 부작용이라면 70세 이상이라는 특정 연령층에 사망자가 집중되는 것이 설명이 안 된다”고 말했다. 독감 백신 이상 반응 신고는 작년보다 줄었다. 2019년에는 약 2000만건의 접종 중에서 이상 반응이 2377건 신고됐다. 그러나 21일 기준 1297만건의 접종이 이뤄진 올해 이상 반응 신고는 431건 수준으로 예년보다 적다.

하지만 백신 접종자들은 급격히 줄고 있다.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서부지부 관계자는 “백신 접종자가 지난 19일 2000명에서 1500명(20일), 1000명(21일), 오늘 650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했다.

한편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12세 이하 접종 백신 물량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보건 당국은 절대량이 부족하기보다는 특정 병원 물량이 먼저 떨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질병관리청은 어린이용 백신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지난 16일까지 전국 병·의원에 예비 독감 백신 물량 34만명분을 추가 공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