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도입과 관련한 정부의 늑장 대처 실체가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해외 백신 충분 확보' 지시는 지난 9월에야 나왔고,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가 백신 도입 과정에서 예상되는 법적 문제 검토 등 실제 행동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인 지난달 하순으로 나타났다. 미국⋅유럽연합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올 6월부터 공격적인 선구매로 백신 도입 계약을 잇달아 체결했지만 우리는 그보다 3~5개월 뒤에야 계약 체결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을 겨우 끝냈던 것이다. 대통령 지시도 늦었고, 정부 대응은 그보다 더 늦었던 셈이다.
22일 국민의힘 백종헌 의원실이 입수한 정부 문서에 따르면 질병관리청은 지난달 27일 ‘제1차 적극행정위원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아스트라제네카⋅화이자⋅모더나 등 해외 제약사들이 개발한 백신을 질병청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도입을 추진하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면책하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질병청은 이에 앞서 지난달 23일 감사원에 공문을 보내 ‘백신 선구매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느냐' ‘백신 도입할 때 세금 부과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질의해 지난달 27일 ‘문제없다’는 내용의 회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같은 절차가 끝난 직후인 지난달 말 아스트라제네카와 최종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백신 도입과 관련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가 늑장 대처 비판 여론이 높아지자 지난달 하순에야 최소한의 법적 절차 검토를 서둘러 끝낸 것이다. 이에 대해 질청 관계자는 “범부처 차원에서 면밀히 검토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는 이날 ‘백신 관련 서면 브리핑' 자료를 내고 “문 대통령이 지난 9월 15일 내부 참모 회의에서 ‘충분한 양의 백신을 확보해 두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자료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9월 이전엔 국내 백신 개발만을 언급했고 해외 백신 구매와 관련한 지시는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이때는 화이자⋅모더나 등 안전성이 검증된 백신 물량은 이미 구하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정부도 최근 “올 7월 해외 제약사와 구매 협상을 할 때 ‘물건이 없어' 힘들었다”고 했다. 대통령 지시가 그만큼 늦었던 셈이다.
文, 해외백신보다 “국내 개발” 강조… 첫단추부터 잘못 뀄다
청와대는 22일 코로나 백신 확보 지연을 향한 비판과 관련, “‘백신의 정치화'를 중단해 달라”며 “대통령이 마치 백신 확보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처럼 과장·왜곡하면서 국민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국민적 우려로 인해 불거진 비판을 ‘백신의 정치화’로 치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월부터 ‘충분한 백신 확보’를 지시했다며 이례적으로 비공개 회의에서 나온 문 대통령 발언까지 공개했다.
그러나 이날 청와대가 공개한 문 대통령 발언·행보 13건 가운데 9건은 코로나 백신 개발(7건)과 SK바이오사이언스의 아스트라제네카가 백신 위탁 생산(2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국제 공조와 수입을 통한 ‘해외 백신 확보’보다 ‘백신·치료제 자체 개발’, 이른바 ‘K백신’을 강조해온 것이다. 13건 중 ‘해외 백신 구매’ 지시 메시지는 지난 9월 15일 내부 참모회의에서 “글로벌 제약사 등을 통해 충분한 양의 백신을 확보해 두라”고 지시한 것이 처음이었고, 나머지는 논란이 확산된 11월 말 이후 집중됐다. 이에 “다른 나라들은 자체 백신 개발과 병행해 지난 6~7월부터 해외 백신 확보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는데, 우리만 K방역을 자신하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자체 백신만 얘기해왔던 것” “대통령의 9월 지시 이후엔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월 SK바이오사이언스 방문에선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전성과 효능”이라고 했다. 이어 국내 백신·치료제 개발 현황을 언급하며 “K방역에 이어 K바이오가 다시 한번 희망과 자부심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같은 달 국회 시정연설에서도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가장 중요한 만큼 지원을 확대해 끝까지 자체 개발을 성공시키겠다”고 했다.
또 지난 9일에도 ‘백신 물량 추가 확보’를 지시하면서도 “치료제 개발은 더 희망적이다. 백신 이전에 치료제부터 먼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확진자 급증과 백신 미확보 문제가 국민적 논란으로 번졌다.
문 대통령이 백신·치료제 개발에 무게를 두며, “속도보다 안전성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내면서 방역 당국의 백신 확보도 늦어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는 그간 백신 확보 지연과 관련, “다른 나라의 부작용 사례 등을 확인해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고 해명해왔다. 이에 관가에선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적폐 청산’을 지켜본 공무원들이 이번에도 추후 책임질 일이 두려워 상부에 직언을 못 했다는 말도 나왔다.
일각에선 문 대통령이 백신·치료제 자체 개발을 강조하고, 화이자·모더나 등은 뒤로한 채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올인’한 것도 K방역 과신 때문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항체 치료제를 개발 중인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은 코로나 사태 이후 문 대통령 현장 방문 행사에 세 차례나 참석해 발언 기회를 가졌다. 또 청와대는 지난 7월 보건복지부와 아스트라제네카, SK바이오사이언스 간 백신 생산 공급 협력 사실을 알리며 “작년 6월 문 대통령의 스웨덴 국빈 방문 등 정상외교가 밑거름이 됐다”고 홍보했다.
문 대통령이 백신 확보 문제로 지난 21일 청와대 참모들과 내각을 질책한 것과 관련해 야권에선 “정책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 아니냐”며 “코로나 배드(bad) 뉴스엔 총리만 나서고 대통령은 ‘K방역’ 홍보 때만 보인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발생 직후였던 지난 2월 코로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한 이후 10개월 만인 지난 13일 다시 회의를 주재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방역 당국, 부처에 맡길 타이밍은 지났다”며 “문 대통령이 ‘컨트롤타워’로 나서 직접 정상외교 등을 통해 ‘백신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대통령이 참모진 등을 질책하기 전에 스스로 실책을 인정하고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보여야 한다”며 “청와대 참모들 없이 다양한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얘기부터 들어야 한다”고 했다. 수도권 지역 한 감염내과 교수는 “결국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루빨리 백신을 전 국민에게 접종해 ‘전 국민 집단 면역’을 달성하는 것”이라며 “대통령이 총력전으로 나서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