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나 낮이나 깜깜한 세상에 살게 되니 기가 턱 막혀 대성통곡했지요. 그런데 이제 뒤돌아보니 시각장애인이 된 게 ‘인생 절정기’의 시작이었더라고요.”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성북구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이하 사실모) 사무실. 시각장애인 권택환(69)씨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반추하며 “무뚝뚝했던 경상도 남자가 요즘은 ‘여보, 사랑한다’는 말도 곧잘 한다”고 했다. 무의미한 연명(延命) 의료는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사전의향서)를 작년 7월 작성한 뒤 찾아온 변화라고 한다. 사실모는 권씨 등 사전의향서를 쓴 42인의 자서전을 묶어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책을 최근 펴냈다. 2018년 2월 존엄사법(연명의료결정법) 시행 3년을 맞아 본지는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의 사연을 취재했다.
몇 년 전만 해도 말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죽음’에 대한 논의가 부쩍 활발해지고 있다. 3년 전 존엄사법이 본격 시행되고, 고통만 연장하는 연명 치료는 받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다. 보건복지부·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사전의향서 작성자는 지난달 21일 80만명을 돌파했다. 사전의향서란 임종 과정에서 소생 가능성이 없을 경우 심폐소생술과 같은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본인 의사를 미리 밝혀두는 문서다. 19세 이상이면 누구나 쓸 수 있지만, 60세 이상 고령층이 전체의 88%(69만6118명)를 차지한다. 이들 외에 지금껏 임종기·말기에 ‘존엄한 마무리’를 선택한 60세 이상(10만9152명)까지 합치면 연명 의료 중단을 선택한 사람은 모두 80만5270명에 이른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우리나라 노인 인구의 상당수가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커지고 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이란 게 태어나 죽는 겁니다. 지금껏 고생시켰는데 가족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죽어야지 않겠습니까.”
지난달 25일 만난 시각장애인 권택환(69)씨는 지난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사전의향서)를 쓰면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했다. 사전의향서를 쓰고 이번에 자서전 작업까지 동참하면서 삶에 대한 권씨의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
경북 상주에서 농사꾼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시각장애인 권씨는 1972년 육군3사관학교에 입학해 1994년 제대할 때까지 남 부럽지 않은 인생을 보냈다. 그러나 제대 후 연거푸 투자 실패하고, ‘중심동맥 폐쇄 시신경 위축’이란 병으로 1999년 시각까지 잃어 좌절감에 휩싸였다. 밤새 술 마시며 실의에 빠져있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등산 대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해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기로 했다. 10년에 걸쳐 ‘국내 100대 명산’ 등반을 하기로 한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되니 아내와 친구들이 저를 완등시켜 주려고 그리 애써 주더라고요. 세상 빛을 잃었던 그때가 제 인생의 어둠이 아니라 절정기의 시작이었던 걸 나중에 깨달았던 거죠.” 거센 비가 내리던 산길을 친구들 손을 잡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완등하면서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절망’이 아닌 ‘희망’을 봤다고 했다.
◇“자식들아, 사랑한다”
목사 남편 덕분에 ‘평생 사모(師母)로 불리는 여자로 살았다'는 나혜옥(72)씨도 작년 1월 사전의향서를 썼다. “홀가분했어요. 연명 의료 안 하겠다고 하면, 애들은 ‘엄마, 나 불효자 만들려고 그래요’라곤 했는데, 제가 아예 제 뜻을 딱 못 박아둔 셈이잖아요.” 그의 자서전엔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홈리스 봉사를 한 일, 남편의 암 투병에 마음 졸이던 일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나씨는 사전의향서를 쓰고 자신의 삶까지 자서전으로 뒤돌아보고 나니 “이렇게 애쓰고 잘 살아왔구나, 이젠 잘 마무리할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자서전에 아들딸에게 남기는 유언 같은 글을 남겼다. “아들딸아! 사랑한다. 정말 많이 사랑했다. 살아생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아낀 것이 후회된다. 어찌 그런 말을 아꼈을까.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왜 ‘죽음’은 준비하지 않나요”
이번에 자서전을 쓴 이들 중에는 2007년부터 웰다잉 상담을 해온 베테랑 상담사 박주택(80)씨도 포함됐다. 30여년 교편을 잡다가 2003년 중앙대사범대부속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그는 “내 마지막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는 취지로 사전의향서를 썼다”고 했다. 사전의향서를 작성하고 자서전을 쓰면서 “삶을 재발견하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한다.
보건 당국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여성(55만3347명)이 남성(23만6646명)의 2.3배 수준에 이른다. 60세 이상 작성자가 다수를 차지했지만, 50대(6만6625명)와 40대(2만935명)도 적잖다.
박씨는 사전의향서 작성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으로 삶의 마무리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 내내 준비를 합니다. 결혼 전에도, 이사하기 전에도 준비하고, 심지어 여행 한번 가기 전에도 얼마나 열심히 준비합니까. 그런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가족과 작별하면서 준비도 없이 떠나는 것은 허망해요.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사전의향서도 챙기고, 준비된 마무리를 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사전의향서 궁금증 Q&A] 보건소·건보공단 지사 찾아 의향서 작성하면 돼… 신분증 반드시 지참
무의미한 연명(延命) 의료를 중단하고 존엄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주로 궁금해하는 점을 정리했다.
Q. 아직 건강하지만 나중엔 연명의료 없이 임종을 맞고 싶다면.
“19세 이상 성인이라면 스스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하면 된다. 일종의 공식 유언장이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별도 등록기관에서만 작성할 수 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홈페이지에서 근처 등록기관을 검색해 연락해본 뒤, 신분증을 들고 방문하면 된다. 일반적으로 지역 보건소나 건강보험관리공단 지사 사무실이 가장 접근성이 좋다. 병원에 문의해도 된다.”
Q.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고 가족이나 의료기관에 알려야 하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서버에 저장돼 관리된다. 가족이나 의료기관에 알리지 않아도, 임종 순간이 다가왔을 때 의료기관이 작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가족들이 임종 직전 연명의료를 강력하게 요구하면 의료진은 이를 거절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미리 가족·지인들과 죽음과 관련된 과정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좋다.”
Q.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때문에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제대로 안할 우려 없나.
“아니다. 회복·회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라면 의료기관은 당연히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의료기관은 말기 혹은 임종 직전이 됐을 때 존엄사 의사 여부를 확인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치료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Q.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작성자 본인이 철회 의사를 밝히면 등록기관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저장해 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폐기한다. 또 임종기에 의사와 함께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는데, 이때 연명의료를 원하는지 아닌지 의사를 분명히 밝힐 수 있다. 환자의 의사 표현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보다 우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