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은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하는 의료법 개정안을 두고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과 대한의사협회가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다. 양측 갈등이 첨예해지고 야당의 반대도 거세지자 지난 2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는 개정안을 계류했다. 국내 코로나 백신 접종이 시작된 가운데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정부·여당과 의료계 간 갈등이 커져 자칫 접종 사업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양측 입장은 여전히 팽팽하다. 개정안 통과에 찬성하는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4대 범죄를 저지르는 의사 수가 적지 않다”며 개정안 통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2일 정의당 강은미 비상대책위원장은 “최근 5년간 살인·강도 등 4대 범죄를 저지른 의사는 2800여명이 넘고,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가 600명인데도 다수가 의사 면허를 유지하고 있다”며 “코로나 시국에서도 본인들의 기득권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 이들을 의사라 칭하기에는 지금도 최전선에서 싸우고 계시는 헌신적인 의사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의협은 “정의당이 언급한 범죄 수치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말 그럴까. 본지 취재 결과 4대 범죄 의사 2800명, 성범죄 의사 600명은 실제보다 조금 더 부풀려진 숫자로 확인됐다. 해당 수치는 일반 의사와 치과의사를 비롯해 한의사, 심지어 수의사의 범죄 숫자까지 포함된 수치였다.
◇더불어민주당도 “성범죄 의사 600명, 4대 범죄 의사 2800명 넘어”
강은미 정의당 비대위원장이 언급한 통계 수치는 지난해 9월 더불어민주당이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공개한 범죄 통계와도 거의 일치한다. 정부의 공공의대·의대정원 확대 추진으로 의료계와 정부·여당 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당시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한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찰청에서 집계·보고한 의사들의 범죄 현황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지난 2015~2019년 성범죄를 저지른 의사는 613명, 경찰이 소위 ‘4대 범죄'라고 하는 살인, 강도, 절도, 폭력을 저지른 의사는 2867명이다. 당시 강 의원은 이런 통계를 공개하며 “이번 의료파업으로 인해 의사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라며 “의료법 개정은 타 전문직과의 형평성을 도모하고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에 대한 엄정한 잣대를 통해 국민들이 안심하고 의료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범죄 통계 ‘의사’에 한의사, 수의사 포함해 집계”
그런데 본지가 경찰청 측에 해당 통계를 확인한 결과 경찰청 측은 “해당 통계에 나오는 ‘의사’는 일반 의사와 치과의사 외에 한의사와 수의사까지 포함된 수치”라고 답변했다. 경찰청이 집계한 ‘성범죄 의사'와 ‘4대 범죄 의사' 수치에도 한의사와 수의사의 범죄 수치도 모두 포함돼있다는 것이다. 본지는 “해당 범죄 통계에서 의사별 수치를 따로 확인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으나 경찰청 측은 “곤란하다”고 답변했다. 한의사와 수의사의 범죄 수치를 별도로 집계하지 않고 ‘의사’에 포함했는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9년 기준 국내 의사 수는 12만6795명, 치과 의사는 3만1640명이다. 한의사는 2만5592명, 수의사는 2만88명이다. 한 의료계 인사는 “백번 양보해도 ‘의사’ 분류에 수의사까지 포함한 건 너무 황당한 집계 방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면허는 보건복지부가 관장하고 있지만, 수의사 면허는 농림축산식품부가 관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계에서는 “공당이 해당 통계에 대해 세부적인 확인도 없이 공표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말들이 나왔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은 지난 25일 경찰청에 “경찰청이 오랜 기간 잘못 분류한 전문직 분류로 인해 대다수의 선량한 의료인으로 활동중인 ‘의사’ 직업의 국민들이 언론과 정치인, 그 밖에 다른 국민들에게 오해 받고 규탄 받으며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는 피해를 받고 있다”며 통계 분류를 시정해달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의료계 일각 “경찰이 말한 ‘강력범죄’시 면허 취소로 수정해야”
경찰청이 작성하는 범죄 통계의 직업별 분류가 더 세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청이 발간한 2019년 범죄 통계를 보면, 경찰이 제시한 전문직별 범죄 현황에서 제시된 직종은 의사, 변호사, 교수, 종교가, 언론인, 예술인 단 6개에 불과하다. 간호사 등을 포함해 그 외 각종 전문직의 범죄 현황은 모두 ‘기타 전문직'으로 분류해 통계를 작성하고 있다. 이번과 같은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으려면 현 실태에 맞게 전문직 범죄자의 직종 분류를 더 세밀하고 정확히 분류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이번 개정안을 두고 “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은 의료인에 대해 면허 취소를 규정하는 건 너무 광범위하니 경찰이 제시한 ‘강력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경찰이 범죄 통계에서 제시한 ‘강력범죄'는 살인, 살인미수, 강도, 강간, 유사강간, 강제 추행, 기타 강간 및 강제추행, 방화 등이다. 지난 2019년 강력범죄를 저지른 의사·치과의사·한의사·수의사는 137명이며 같은 기간 기타 전문직은 727명, 종교가 112명, 예술인 101명, 교수 54명, 언론인 18명, 변호사 13명 등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료계 인사는 “의협이 백신 접종을 앞두고 의료법 개정안을 반대하며 백신 접종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잘못된 일이고 무리수를 둔 것”이라며 “여당과 국회도 무리하게 개정안을 추진해 의료계의 반발을 키우기보다는 ‘강력범죄로 금고형이 선고된 의사'에 대해 면허를 취소하는 쪽으로 개정안을 수정해 큰 갈등 없이 백신 접종이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