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자를 얼리니 해방된 것 같아요. (임신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고 ‘보험’ 잘 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기도 판교에 있는 회사에 다니는 박미리(가명·35) 대리는 29일 난자 냉동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지금 결혼할 생각도, 아이를 낳을 생각도 전혀 없어요. 그런데 만약 나이 오십 돼서 아이 없는 게 후회되지 않을까 싶어 ‘보험 든다’는 생각으로 (난자) 냉동한 거지요.”
작년 한 해 출산한 산모 열 명 가운데 세 명이 35세 이상 고령 산모일 정도로 ‘늦맘’(아이를 늦게 낳는 엄마)이 급속 확산하고 있다. 늦맘이 많아지면서 한국 사회의 임신·출산 풍속도도 바뀌어 가고 있다.
우선 남들 할 때 결혼·출산하는 대신 ‘난자 냉동 보관’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동결 보존 난자’(난자 냉동)는 2019년 3만4168개로 해마다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이는 2015년(8018개)의 4배, 2010년(5839개)의 6배 수준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IT(정보기술) 기업처럼 국내 기업들도 복지 차원에서 직원들의 난자 냉동을 지원하는 데 나서고 있다. 차병원난임센터에 따르면, 이 병원과 양해각서(MOU)를 맺고 자사 직원들이 찾아올 경우 특별 의료 서비스를 받도록 해주는 국내 기업이 작년 현재 5곳으로 파악됐다.
◇”난자를 얼리고 커리어를 해방”
2014년 미국 블룸버그 잡지는 ‘당신의 난자를 얼리고 커리어(career)를 해방하라’는 기사를 냈다. 임신·출산·양육 걱정에 매달리기보다 난자를 냉동해 놓고 일에 매진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트렌드는 국내에서도 차츰 현실화하고 있다. ‘20대 결혼, 30대 출산’이란 기존 인생 공식을 따르지 않고 ‘늦맘'을 선택한 여성들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
지난 2월 자신의 난자를 동결한 김선미(가명·37)씨는 대기업 상품기획자(MD)로 일한다. 김씨는 “출산·육아를 병행하는 동료들을 보니, 지금 당장은 ‘엄마’보다는 ‘일’이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며 “아이 낳으면 일터에서 몇 년 공백이 생겨 경력 단절 걱정이 컸다”고 했다. 결혼을 했지만 출산을 미루고 있다는 회사원 A씨는 “학교 강단에 서는 걸 목표로 이직 준비 중”이라며 “이런 와중에 아이 출산 후 독박 육아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거 같아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난자를 얼려두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여성 직원이 많은 회사에 다닌다는 박지연(가명·37)씨는 직장 동료 충고를 듣고 난자 냉동 결정을 했다. 박씨는 “40대 후반 여자 선배들이 최근 늦은 결혼을 한 뒤 아이를 못 가져 애를 쓰더라”며 “‘네 나이에라도 난자 냉동을 해뒀으면 좋았을걸' 하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결국 난자 냉동을 선택한 이들의 이면엔 경력 단절 우려나 사내 경쟁에서의 낙오, 독박 육아에 대한 걱정 등이 응집돼 있는 것이다.
최진호 아주대 명예교수는 “직장 선배들이 출산·육아에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면서 여성들이 자꾸 출산을 미루고 난자를 냉동하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라며 “스웨덴처럼 육아휴직을 유연하게 쓰도록 하면서, 여성들 경력 단절을 막고, 육아 돌봄 지원하는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했다.
◇난자 동결 맹신은 안 돼
동결 과학은 빠르게 발전 중이지만, 난자 동결을 ‘시간을 멈추게 할 신기술’로 맹신하는 건 위험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광 미즈메디병원 아이드림센터장은 “난자 냉동은 35~37세 전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며 “44~45세까지도 난자 냉동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나이가 한 살씩 많아질 때마다 임신 성공률이 낮아진다”고 했다. 허윤정 차 여성의학연구소 교수는 “난자 냉동은 가임력 보존의 수단이지, 임신·출산을 보장하진 않는다”며 “다만 조기 폐경이나 자궁내막증 우려가 있으면 되도록 일찍 동결 보존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