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학대해 숨지게 한 양부모에 대한 결심 공판이 열린 14일 서울남부지법 입구에서 한 시민이 정인이의 사진을 만지고 있다. ‘정인이 사건’ 이후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위기 아동 가정 보호 사업’ 신청자가 늘고 있다. /뉴시스

“이 아이들은 부모에게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애들이에요. 이제 어머님 아버님이 정원이 1명인 보호 시설이 되어 새로운 기억을 갖도록 도와주세요.”

지난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아동권리보장원 교육장. 20여 수강생이 ‘학대 아동 양육 코칭’ 수업을 듣고 있었다. 37~59세까지 다양한 연령대 참가자들이 강사가 한마디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눈물을 글썽였다.

강사가 “아이와 애착이 형성되면 아이는 그걸 평생 가지고 살아가게 돼요. 그 기억이 살아가는 힘이 됩니다”라고 말하자 주위가 숙연해졌고, “아이의 삶은 누구 것인가요?”라고 묻자 “아이”라는 대답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날 수강생들은 ‘위기 아동 보호 가정’에 지원한 예비 위탁 부모들. ‘정인이 사건’ 이후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즉각 분리 제도’를 통해 학대 부모에게서 분리한 0~2세 아이들을 최장 6개월간 돌보는 역할을 맡는다.

지난 3월 모집을 시작했는데 한 달 만에 전국에서 525가정이 자원했다. 아동권리보장원 박다은 과장은 “기존 아동 위탁 보호 경험이 있는 75가정 외에 450가정은 처음 나선 이들”이라며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모인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이 사건’에 마음 아파 결심”

지난 14일 열렸던 ‘정인이 사건' 재판은 ‘학대 아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이날도 교육을 받기 위해 모인 예비 위탁 부모들은 ‘분노'에 머물지 않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입을 모았다.

25년간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으로 일했던 이모(59)씨는 “결손 가정 아이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했는데, 타인과 눈도 잘 못 맞추는 버려지고 깨어진 가정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며 “그동안 돕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정인이 사건’을 보며 이젠 참여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고 했다. 청소년 상담사로 일했고 대학원 심리치료 석사 과정에 다니고 있는 김신정(52)씨는 “전날(13일)에도 모텔에서 생후 2개월 아이가 심정지 상태로 발생되는 일도 있지 않았느냐”며 “제 아이가 난치성 질환을 가지고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젠 받은 걸 사회에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광주 광산구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강춘자(52)씨는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강씨는 “오랫동안 해온 일이 아이들을 돌보는 거라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보육 교사로 일했던 최은혜(37)씨는 “우리 딸이 딱 그 또래였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며 “그동안 남을 위해 살지 못했는데 이제는 좀 다르게 살고 싶다”고 했다. 이미 두 아이를 수년째 위탁받아 키우고 있는 남성도 있었다. 그는 “상처가 있는 아이들을 맡아 키우면서 밤새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든 적도 많았다”며 “하지만 아이 인생을 생각하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경험담을 공유해 박수 받았다.

◇“관심 계속 이어졌으면”

‘위기 아동 보호 가정'에 참여할 수 있는 부모는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교사, 의료인, 청소년 상담사, 심리 관련 학과 졸업자 자격을 갖추고 경력이 3년 이상이어야 한다. 기존 위탁 부모 경험이 3년 이상 있어도 된다. 아동 보호 사업 현장에선 ‘정인이 사건’이 쏘아 올린 관심과 정부 지원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길 바란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번 ‘위기 아동 가정 보호 사업’을 위해 보건복지부는 지방자치단체에 매칭 방식으로 예산을 지원했다. 아동권리보장원 관계자는 “그동안 아동 보호 사업이 지자체 예산에 의존해 운영되다 보니 세심한 관리와 비용이 들어가는 가정 보호가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사업으로 즉각 분리(최장 6개월 위탁 가능) 예산은 어느 정도 보장이 됐지만, 즉각 분리 기간이 끝난 뒤 장기 보호와 관련해선 달라진 게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9년 기준 보호가 필요한 국내 아동을 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보호한 경우는 전체의 32%에 그친다. 아동을 시설로 보내는 일이 거의 없는 일본이나, 영국(74%), 미국(65%) 등보다 낮은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