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개발 연구소 방문한 러시아 총리 미하일 미슈스틴(왼쪽에서 두 번째) 러시아 총리가 5일(현지시간)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벡토르 국립 바이러스·생명공학 연구센터'를 방문해 연구원들의 백신 연구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벡토르 센터는 스푸트니크 V에 이어 러시아 정부의 승인을 받은 두 번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에피박코로나를 개발한 곳이다. /연합뉴스

정부가 러시아의 ‘스푸트니크V’ 백신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의 사용 허가도 나오기 힘들 뿐 아니라 러시아가 국내에서 사용 승인 신청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의 기대와 달리 러시아 백신 도입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 백신의 안전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정부도 뒤늦게 백신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푸트니크V 백신의 안전성에 대해선 구체적 임상 자료나 검증된 통계가 없어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은 물론이고 유럽의 식품의약품청의 사용 승인도 받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미국 FDA가 앞으로도 러시아 백신을 사용 승인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보고 있다. 유럽 식품의약품청도 러시아 백신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없어 승인을 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현재 러시아 백신을 도입한 나라는 이란 아르헨티나 알제리 헝가리 베트남 인도 등 58개국이지만 서방 선진국 중에선 한 곳도 없다. 따라서 미국과 유럽에서 사용 승인이 나지 않은 러시아 백신을 우리 정부가 단독으로 심사해서 도입하기는 사실상 힘들다는 평가가 많다.

더구나 러시아 백신이 국내에 도입돼 접종되려면 러시아에서 국내 질병관리청에 스푸트니크V 사용승인 신청을 해야 한다. 그런데 스푸트니크V는 국내에서 사용승인 신청조차 돼 있지 않다. 여권 관계자는 “우리가 스푸트니크V를 도입하기 위해 러시아 측에 사용승인 신청서를 질병관리청에 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너무 굴욕적인 일이라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단기간 내에 러시아 백신을 들여와 대국민 접종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백신 도입에 노력을 쏟기보다는 미국 정부에 대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화이자·모더나 백신을 조속히 들여오는 게 더 낫다”고 했다.

현재 상반기 중 화이자나 모더나 수급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모더나가 계약 위반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형식적으로 최소량만 보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상반기 중 모더나 백신 공급은 사실상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정부는 ‘계약을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백신 공급이 안 지켜지느냐’는 지적에 대해 “계약 내용은 비밀”이라고 함구하고 있다. 국회 요구에도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백신 스와프에 대해 진지하게 협의하고 있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는 하나도 없다. 백신 부족에 대한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립서비스일 뿐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은 주변국을 도우려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당장은 백신이 부족해 어렵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백신 스와프를 하기 힘들다는 뜻을 비친 것으로 해석됐다. 미국이 설사 백신 스와프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이 아닌 혈전 부작용이 있는 아스트라제네카나 얀센, 아직 사용승인이 나지 않은 노바벡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현재 아스트라제테카 백신을 사용 승인하지 않고 쌓아둔 채 캐나다나 멕시코에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백신 수급 실패는 K방역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과 국내 백신·치료제 개발에 대한 오판, 싼 백신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참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청와대는 작년 하반기 “연내에 국내에서 치료제와 백신 개발이 가능하다”는 일부 제약사들의 말만 믿고 백신 구매에는 제대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화이자가 아스트라제네카보다 6배 가량 가격이 비싸다는 점 때문에 값이 싼 아스트라제네카나 노바벡스 확보에 주력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백신 수급 실패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하고 양해를 구하라는 요구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방역 실패를 자인하면 정치적 패배라고 여기는 듯하다.

내달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 백신 담판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내달 정상회담이 백신 조기 도입을 위한 한가닥 희망”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뉴욕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북한과 마주 앉고 중국과 협력해야 한다” “트럼프의 대북 정책을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요구한 것은 이 같은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고의 전략 물품인 백신을 미국에서 얻어내려면 미국이 원하는 대가를 줘야 하는데, 문 대통령은 ‘오로지 북한’ 노선에 빠져 바이든에게 호통만 쳤다는 것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며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는 미국이 요청한 대중(對中) 안보협의체인 ‘쿼드’와 첨단기술·공급 네트워크 참여를 외면해 왔다. 백신 확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미국에 먹히지도 않을 요구만 해왔다는 것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우리 정부의 백신 외교력을 평가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