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 유명 대학병원. 병동서 일하는 간호사가 응급실에서 연락이 오자 수술복을 입고 내려간다. 마치 ‘당직의사’ 같다. 응급 환자에 대한 진단이 허파에 바람이 새는 기흉으로 나오자 서둘러 갈비뼈 사이 피부를 1~2㎝ 절개하고 흉관을 삽입한다. 수술복을 입은 ‘남자 간호사’라 환자들은 ‘의사’인 줄 알지만 알고보면 흉부외과 의사가 없어 긴급 투입한 간호사. 병원에선 이런 간호사를 ‘피에이(PA·Physician Assistant·의사 보조)’라 부른다. 엄격히 따지면 간호사가 하는 업무 범위를 넘었기 때문에 의료법 위반이다. 17일 서울대병원이 이 같은 피에이를 합법적인 진료 보조 인력으로 규정하고 제도화하는 조치를 취하자, 의료계가 찬반 논란에 싸였다.
◇불편한 진실 ‘피에이’ 1만명
현재 거의 모든 대학병원들은 레지던트(전공의) 인력이 부족해 피에이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수술실에서 의사와 함께 수술대에 달라붙어 ‘보조 의사’ 역할을 한다. 환자 증상을 살피고 처방도 내며, 상처를 소독하고, 진단서도 작성한다. 모두 레지던트가 해야 할 일이다. 피에이들은 수술 도구 만지는 법, 상처 꿰매는 법 등을 동영상이나 전문의 강의를 통해 독학한다. 피에이는 외과나 산부인과·비뇨기과·흉부외과 등 레지던트 부족 현상이 심한 분야에 많은데, 피에이가 없으면 대학병원이 안 돌아간다는 말까지 나온다.
의료법에 따르면 간호사 업무는 ‘의사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 보조’로 한정된다. 간호사가 직접 절개나 봉합, 처치를 하면 안 된다. 그래서 피에이를 놓고 불법 의료행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의사 일을 대신 하지만 월급은 간호사”라며 “의료소송이 나면 불법으로 취급되어 불안하다”고 하소연한다.
지난해 보건의료노조가 8개 대학병원을 조사한 결과, 피에이 인력은 총 717명. 병원 한 곳당 평균 90명꼴이다. 이를 기준으로 전국 병원 피에이가 1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병원간호사회에 따르면 최근 7~8년 동안 피에이가 4배가량 늘었다.
◇'피에이' 양성화 첫 시도
현실과 제도 사이 마찰이 이어지자 서울대병원이 최근 피에이 존재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합당한 역할과 지위, 보상체계 등을 적용하기로 했다. 대상은 약 160명이며 호칭도 CPN(Clinical Practice Nurse·임상전담간호사)으로 대체키로 했다. 이들은 소속을 ‘간호본부’에서 ‘진료과’로 바꾸고 업무는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수행하도록 할 예정이다. 피에이를 ‘보조 의사’ 성격으로 양성화하겠다는 의지다. 김연수 병원장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에서 “피에이를 적극 양성하고 관리한다면 국민에게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병원 의사들과 전공의들은 “병원 경영을 위해 불법 의료를 용인하는 꼴”이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병원의사협회(병의협)는 이날 “서울대병원은 불법적인 피에이 합법화 시도를 즉각 철회하고, 국민과 의료계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성명서를 냈다. 병원의사협회는 병원에 소속된 의사 단체로 대한병원협회와는 다르다. 병의협은 “불법 의료인 피에이 수가 계속 늘어나고, 행위도 의사 고유 영역으로까지 넓어지는 등 불법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면서 이는 의료인 면허체계의 붕괴, 의료 질 저하, 의료 분쟁 발생 시 법적 책임의 문제, 전공의 수련 기회 박탈 등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조치에 대해 감사원 감사, 청구, 법적 고발 등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병의협은 전했다.
보건복지부는 그동안 “피에이는 의료법상 불법”이란 원론적인 태도이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단속하거나 고발 조치 등을 하진 않았다. 복지부와 국회에서 의료법 개정을 통해 피에이를 합법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아직 성과는 없는 상태다. 앞으로도 서울대병원 계획을 두고 공방이 이어질 전망이다. 이우용 대한외과학회 이사장은 “미국에서는 피에이를 2년 교육과정을 통해 제도적으로 양성하여 운영한다”며 “환자 안전을 감안해 먼저 피에이에게 위임할 수 있는 업무 영역을 명확히 정해서 이를 병원들이 따르게 하고 피에이 제도화를 어떻게 할지 논의하는 게 문제 해결의 순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