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국민 557만명(55~59세 167만명, 50~54세 390만명)의 접종 일정이 최소 일주일 이상 줄줄이 연기됐다. 정부는 14일 오전 “12일 중단됐던 55~59세의 모더나 백신 접종 예약을 14일 오후 8시부터 재개한다”면서 “접종 일정도 당초 오는 26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에서 다음 달 14일까지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예약 재개를 불과 12시간 앞둔 상태에서 느닷없이 나온 발표였다.
정부는 이날 “55~59세 접종 대상자의 연락처가 없어 지자체나 누리집(홈페이지)을 통해 (접종 재개 등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다. 14일 저녁부터 예약이 재개되는데 당일에야 접종 당사자들에게 알리겠다는 것이다. 서울에 사는 이모씨(56)는 “예약 재개 소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왜 이렇게 기습적으로 하느냐”고 했다. 이틀 만에 재개된 예약은 또 접속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오후 8시 예약이 재개되자 수십만명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예상 대기 146시간'이라는 메시지가 뜨기도 했다. 접속 장애는 한시간 가량 지속됐다.
정부는 당초 55~59세 352만명에 대해 “다음 달 7일까지 접종을 완료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난 12일 갑작스러운 예약 중단 조치로 185만명만 예약에 성공했다. 그런데 정부가 이틀 뒤 예약을 재개하면서 “1차 예약하지 못한 167만명은 이미 예약에 성공한 185만명 가운데 예약 변경으로 빈자리가 생기면 다음 달 7일까지 접종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달 9~14일 접종이 가능하다”고 했다. 기존 예약자 중 취소자가 나오지 않으면 167만명은 당초 정부가 밝힌 접종 일정보다 최대 3주 뒤에야 백신을 맞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정부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머지 연령대 백신 접종 일정도 줄줄이 연기됐다. 50~54세 접종 일정은 당초 다음 달 9~21일이었으나 1주일 늦춰진 16~25일로 연기됐다. 40대 이하 접종은 8월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접종은 9월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이날 정부는 “모더나 백신 수급에 차질을 빚은 것은 아니다”라며 “7월 마지막 주 공급 예정인 모더나 물량이 정확히 언제 들어오는지 확정되지 않아, 의료기관에 백신을 언제 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중단했던 것”이라고 했다. 결국은 백신 수급 일정이 불확실한데도 무리하게 352만명에 대한 백신 접종 일정을 국민에게 알리고, 예약 중단 사태가 빚어진 데 이어 또다시 느닷없이 50대 수백만명의 접종 일정을 사전 고지 없이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이다.
백신 계약땐 자랑하더니... 정작 접종땐 공급물량 침묵하는 정부
50대 국민의 모더나 백신 접종 일정이 14일 줄줄이 연기되자 “생색은 정부가 내고 피해는 국민에게 떠넘긴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제약사들과 백신 계약을 맺을 땐 ‘K방역 성과’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하더니, 그 후론 어떤 백신이 언제 얼마나 도입되는지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서 느닷없이 ‘예약 대란’ ‘접종 연기’ 같은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백만 국민의 백신 접종 차질이 빚어진 이유를 묻자 정부는 이날 “백신 수급은 차질 없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을 했다.
◇계약할 땐 ‘떠들썩’ 이후엔 ‘잠잠’
정부는 작년 말부터 ‘우리는 외국처럼 확진자가 많지 않아 백신이 급하지 않다’ ‘해외 접종 추이를 본 후 백신 안전성이 확인되면 그때 맞아도 늦지 않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도 백신 조달 계약을 맺을 때마다 정부 주요 인사들이 앞다퉈 나서 ‘백신 수천만명분 추가 도입에 성공했다’고 발표해왔다. 올 4월엔 “백신 가뭄은 사실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전체 인구(5135만명)의 2배 물량을 확보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3분기 8000만회분, 4분기 9000만회분’ 등 분기별 도입 일정도 이 즈음 발표됐다.
하지만 이후 두 달 가까이 하반기 백신 도입 일정은 전혀 발표되지 않았다. 정부는 3분기를 불과 보름 앞둔 지난달 17일에서야 “7월 물량은 1000만회분, 나머지 7000만회분은 8~9월 도입 예정”이라고 밝혔다. 7월부터 모든 성인이 순조롭게 백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어디에도 없었다.
◇8월에 얼마나 들어올지 정부도 “아직 몰라”
7월 절반이 지난 현재까지 국내 도입된 백신은 약 200만회분에 불과하다. 800만회분이 더 들어와야 하지만 어떤 백신이 언제, 얼마나 들어오는지는 여전히 ‘깜깜이’다. 정부는 백신의 국내 도착 2~3일 전에야 ‘이번에 화이자 백신 50만회분이 들어온다’는 식의 발표를 되풀이하고 있다. 제약사들과의 ‘비밀 유지 협약’ 때문에 세부적인 공급 일정을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우주 고려대 감염내과 교수는 “화이자·모더나 같은 유명 국제 제약사들이 한 달도 아니고, 한 주 단위로 쪼개 비밀 유지를 요구한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부가 비밀 유지 조항을 입맛대로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정부는 지난 12일 “7월까지 확보한 모더나 백신 185만명분에 대한 예약이 끝나 부득이 55세 이상 예약을 중단했다”고 밝혔다가 ‘비밀 유지 조항 위반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자 “모더나 측에 양해를 구했다”고 설명했다. 평상시 국민에겐 알리지 않지만 정부가 필요할 때는 공개할 수 있다는 식이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정부가 비밀 유지 조항을 핑계로 백신 도입 차질을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자체와의 소통도 막혀 있다. 방역 당국은 이날 “14일 오후 8시부터 55~59세 접종 예약이 재개된다. 대상자들에게는 지자체와 홈페이지를 통해 알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서울시 방역 당국 관계자는 “접종 재개 사실도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며 “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알리라는 지침도 전혀 전달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깜깜이 백신 정책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정부는 “8월엔 20~40대까지 백신 1차 접종이 본격 시작될 것”이라고 했지만 당장 다음 달 도입되는 백신 물량이 어느 정도 될지 정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