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이모(64)씨는 며칠 전 걸어서 20분 거리 있는 마트에 다녀오다 몇 번을 주저앉았다. 오전부터 쏟아지는 뙤약볕에 숨이 막히고 정신이 혼미해 주변 건물 바닥에 앉아 쉬었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이씨는 “정신을 잃을까 겁이 나더라”며 “마스크를 벗을 수 없어 더 힘들었다”고 했다.
전국이 폭염으로 뜨겁게 달궈지면서 열사병과 탈진·실신 같은 온열(溫熱) 질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마스크 착용이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오상우 동국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는 “혈압 조절이 잘 안 되는 고혈압과 저혈압, 심·뇌혈관 질환 등 만성 질환이 있으면 더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폭염에 온열 환자 급증 주의보
지난 11~17일 전국 응급실 496곳에 들어온 온열 질환자는 253명으로 전주(32명) 대비 8배 가량으로 폭등했다. 이들 중 3명이 온열 질환으로 숨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4일 80대 여성이 혼자 밭일을 하다 쓰러져 목숨을 잃었고, 16일에는 실외에서 일하던 60대 남성이 의식 저하 증세를 보인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세상을 떠났다. 17일에도 50대 여성이 길에서 쓰러진 뒤 사망했다. 지난주 전국에 폭염주의보·경보가 내려지고 낮 최고기온이 33도 안팎까지 오르면서 온열 질환자가 급증한 것이다.
지난 5월 20일 이후 전체 온열 질환자 436명을 살펴보면, 건설 현장이나 제조·설비 현장 등 실외 작업장에서 발생한 환자가 44.3%로 가장 많았고, 논·밭 13.1%, 길가 10.8%, 공원·운동장 6% 등 순이었다. 시간대로는 오후 3~4시(62명), 오전 10~12시(57명), 오후 2~3시(56명) 순서였다. 연령대별로는 50대(117명), 40대(75명), 60대(63명), 20대(49명) 등이었다.
온열 질환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장마가 사실상 20일 막을 내리면서 더운 공기를 품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한반도 쪽으로 본격적으로 확장, 한 단계 더 강한 폭염이 닥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3일 이례적으로 늦게 시작된 장마가 20일 끝난다면 지속 기간이 18일로, 1973년(6일)과 2018년(중부 16일·남부 14일)에 이어 역대 세 번째 짧은 장마철이 된다.
장마가 끝나면 더위의 양상도 달라진다. 지난주부터 이어진 더위가 후텁지근한 ‘찜통더위’였다면, 앞으로는 구름 없는 맑은 하늘에 뙤약볕이 내리쬐는 ‘불볕더위’가 예상된다. 고온 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 영향으로 습도는 높지만 지면을 잠시나마 식혀줬던 국지성 소나기 역시 거의 내리지 않을 것으로 보여 엎친 데 덮친 격이다.
20일에도 서울·춘천 34도, 대구·광주 33도 등 전국 낮 최고기온이 29~35도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평년보다 1~3도 정도 높은 수치다. 온열 질환 감시 체계가 시작된 2011년 이후 가장 많은 환자(4526명)가 발생한 지난 2018년엔 국내 기온이 기상관측 이래 가장 높은 41도(홍천)를 기록했고 서울도 39.6도까지 올랐다.
◇”널찍한 곳 찾아 마스크 벗고 쉬어야”
온열 질환은 방치하면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코로나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도 중요하지만 거리 두기를 지키는 것을 전제로 틈틈이 벗고 쉬는 게 좋다. 질병관리청은 “무더운 실외에서 마스크 착용은 심박 수, 호흡 수, 체온 상승 등 신체에 부담을 줄 수 있다”며 “실외에서 사람 간 2m 이상 충분한 거리 두기가 가능하다면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했다. 2m 이상 거리를 둘 수 없을 때는 충분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마스크를 벗고 휴식하라는 권고다.
심·뇌혈관 질환, 고혈압‧저혈압, 당뇨병, 신장 질환 등 만성 질환자는 더위로 증상이 나빠질 수 있어 더 조심해야 한다. 물, 그늘, 휴식은 온열 질환을 예방하는 3대 요건이다. 규칙적으로 수분을 섭취하고 어지러움, 두통, 메스꺼움 등 증상이 있을 때에는 즉시 시원한 곳으로 이동해 쉬어야 한다. 실외에서 일할 때는 혼자보다는 되도록 2인 1조로 일해야 한다. 온열 질환자를 발견했다면 즉시 시원한 장소로 옮기고, 물수건·물·얼음 등으로 몸을 닦고, 부채나 선풍기 등으로 체온을 내려줘야 한다. 의식이 없다면 바로 병원으로 옮긴다. 질식 위험이 있으므로 음료수를 억지로 먹여서는 안 된다.
☞온열 질환
무더운 환경에 장시간 노출 시 체온이 37~40도까지 올라 발생하는 급성 질환. 두통·어지럼·근육 경련·피로감·의식 저하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방치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 신속히 체온을 낮춰야 한다. 열사병과 열탈진, 열경련, 열실신, 열부종 등이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