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수동의 의류 제조 업체 ‘유베이스 인터내셔날’. 토리버치·마이클코어스 등 이름난 패션 브랜드를 고객사로 두고 있는 이 회사에서 3년 차 사원 홍승민(23)씨는 영어 이름 ‘루카스’로 불린다. 매일 8시간 일하면서 해외에서 온 택배 물품들을 정리하고 영어 송장 등을 번역하는 일을 맡고 있다.
승민씨는 ‘영어 능력자’로 입사했다. 토익 점수가 높거나 회화 실력이 탁월한 수다쟁이는 아니지만 영어로 돼 있는 자료라면 무엇이든 순식간에 읽어내리고 머릿속으로 번역까지 마쳐버린다. 동료 박성길(31)씨는 “한번 습득한 업무는 빈틈없이 해내는 친구여서 믿고 맡길 수 있다”고 했다.
승민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스퍼거 증후군(사회적 상호 교류의 장애) 판정을 받은 자폐성 장애인이다. 어머니 권오주(54)씨는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걸 좋아하고 꽂히는 것에만 관심 가졌는데, 그게 바로 영어와 공룡이었다”고 했다. 승민씨는 영어로 된 공룡 책을 섭렵했고, 영화 ‘쥬라기 공원’을 통째로 욀 때까지 돌려 봤다.
일반 학교에서 고교 과정까지 마치고 발달장애인 전문 교육기관인 호산나대학에 들어가 사무자동학을 전공하던 그를 중증장애인 직업재활 지원 사업 수행기관인 강북장애인종합복지관의 장애인재활상담사 김승환(33)씨가 눈여겨봤다. 졸업생들 모의 면접을 보는 자리에서 처음 만난 승민씨는 답변도 ‘네, 아니요’가 전부였다. 그런데 영어 얘기가 나오자 이야기 보따리를 터뜨렸다.
국내 중증장애인의 고용률(21.8%)은 전체 인구 고용률(61.2%)의 3분의 1 수준이다. 승민씨는 보건복지부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중증장애인의 자립 기반 마련과 사회 참여 증진을 위해 진행하고 있는 ‘중증장애인 직업재활 지원 사업’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 2019년 8월 지금 회사에 정식 채용됐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으면 상대의 마음을 읽고 거기에 맞춰 반응하는 사회적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승민씨도 첫 석 달은 말도 안 하고 눈도 안 맞췄다. 박성길씨가 매일 곁에서 원단 분류부터 엑셀 사용법까지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박씨는 “승민이는 꾀 한번 부리지 않고 지각하는 법도 없다”며 “요즘은 장애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라고 했다.
권씨는 아들이 첫 월급으로 156만8880원(실수령액)을 받아온 날을 기억했다. “‘더 이상 아드님과 같이 일할 수 없겠다’는 전화를 받을까 봐 한동안 마음을 졸였다”는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승민이가 참 많이 유들유들해졌다. 동료들한테 먼저 물어보고 일상도 공유하는 아들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기쁨은 아무도 짐작 못 할 것”이라고 했다.
승민씨는 첫 월급 중 100만원을 모교 호산나대학에 기부했다. “저는 이 직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드디어 내게도 맞는 일이 생겼으니까 이대로, 가능하면 쭉 이어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