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를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우리나라도 오미크론 변이가 우세종이 되는 게 기정사실화됐다”며 “정부는 그동안 준비해 온 오미크론 대응 체제로 신속히 전환하고 총리를 중심으로 범부처가 총력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오미크론 비상사태’를 공식화한 것이다.
오미크론 확산에 따라 19일 국내 코로나 신규 확진자는 6603명으로 집계됐다. 지난달 24일(6233명) 이후 27일 만에 6000명대를 넘어섰다. 코로나 양성률은 3.7%로 닷새 만에 2배 가까이 치솟았다. 20일에는 오후 10시 현재 이미 확진자가 전날보다 650명 이상 많은 6000명을 넘어섰다. 최종 7000명대에 육박할 전망이다. 정부가 지난 14일 ‘오미크론 확산 대응 전략’을 통해 공개한 ‘대응 단계’ 전환 기준 7000명에 근접했다.
그런데도 방역 당국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14일 당시 이기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제1통제관이 “하루 확진자가 한 번이라도 7000명 선을 넘으면 오미크론 맞춤형 방역 체계에 돌입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20일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은 “기계적으로 7000명이 넘어가면 바로 시행한다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앞으로 1~2주 시간을 갖고 7000명 수준에서 점진적으로 체계를 전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1주일 만에 말이 달라진 셈이다.
정부 지침이 불분명해 의료 현장에서도 혼선을 겪고 있다. 정부가 14일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7000명 넘거나 오미크론이 우세종화하면 동네 병·의원급에서도 경증 코로나 환자 진료와 치료를 하겠다”고 했는데, 20일엔 “의료 체계를 180도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단계적·점진적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동네 병원들은 “코로나 환자를 진료할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다”면서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오미크론은 지난해 12월 초 국내 첫 감염이 확인됐다. 방역 당국은 오미크론이 우세종화하기까지 8~9주 걸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델타는 지난해 4월 첫 확인 이후 우세종화까지 14주 걸렸다. 확산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은 탓인지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있다. “오미크론 위기가 온다”며 한 달 전부터 경고해 온 당국은 앞서 밝힌 방역 전환 기준을 일주일도 안 돼 바꾸고, ‘오미크론 사태’를 공식 선언한 방역 컨트롤 타워 청와대와도 엇박자를 내고 있다.
대전 한 내과 원장은 “코로나 환자를 진료한 적도 없는 동네 병원들에 어느 날 갑자기 코로나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라는 건 무책임한 지시”라면서 “(코로나 환자가 온다면) 병원 입장에선 다른 일반 환자는 받지 말란 얘기”라고 했다. 일선 의원에선 “지침은커녕 가이드라인조차 받은 게 없다”면서 “다음 주 당장 코로나 환자가 쏟아져도 환자를 받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방역 당국은 대한의사협회와 일주일 가까이 아무 협의도 하지 않고 있다가 19일 오후 늦게 동네 병원 참여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교수는 “정부의 상황 인식 자체에 시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오미크론 유행은 본격화했고 대응 체제도 벌써 가동했어야 한다. 이러다간 정부 결정 과정이 유행을 못 따라가 늦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오미크론 대응 체제로 전환할 경우 고령층 등 고위험 환자를 제외한 일반 시민들은 동네 병원에서 신속항원검사로 코로나 검사를 받도록 하겠다는 부분도 오리무중이다. 비용은 병원마다 다르고 이를 채택하지 않는 병원도 많은 데다, 건강보험에서 이를 지원할지 말지도 결정된 바가 없다.
‘게임 체인저’라 불리던 화이자의 먹는 치료제 팍스로비드는 기저질환 장벽에 부딪혔다. 16일 팍스로비드 처방은 39명에 그쳤다. 방역 당국은 “하루 1000명씩 투여 가능하다”고 했지만 실제론 저조하다. 경북도의사회 관계자는 “팍스로비드와 같이 먹을 수 없는 금지 의약품 성분이 28개인데, 대부분 당뇨병·고혈압·고지혈증 등 고령층 환자들이 비교적 흔하게 갖고 있는 기저질환 약에 들어있는 성분들”이라며 “이미 먹는 성인병 약물을 중지하고 팍스로비드를 먹으라 말하기 매우 어렵다”고 전했다. 앞으로 오미크론 확산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먹는 치료제가 제 역할을 못 한다면 상황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전에도 정부는 방역 상황과 관련해 번번이 안일한 인식으로 국민들 불편을 자초한 적이 많았다. 2020년 코로나 사태 초기 “KF80 또는 94 마스크를 착용해야 효과가 있다”고 했다가 마스크 대란이 불거지자 “천 마스크도 된다”고 했고, 지난해엔 모더나 백신 도입을 장담했다가 공급 차질로 55세 이상 예약이 중단된 바 있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위드 코로나’ 역시 하루 확진자 1만명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병상·인력 확충 등 준비가 부족해 45일 만에 좌초된 전력도 비슷하다.
14일 정부가 “7000명 넘으면 ‘대응 단계’ 전환”이라고 발표한 날도 마침 서울행정법원이 방역패스 효력을 정지시켰다. 이날 법원 결정을 앞두고 방역 당국은 오미크론 위기와 대응을 강조하면서 방역패스 시행에 대해 보도자료를 냈다. 그런데 법원에는 “그건 보도자료일 뿐, 질병관리청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은 대외적으로 이를 공표한 사실이 없고 집행은 지자체장이 별개로 하므로 행정처분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소송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기 위해 보도자료와 공표를 구분하며 발언 공신력을 스스로 훼손한 것이다. 오미크론 공세가 심각한 광주광역시 시민 조모(89)씨는 “정부가 매번 말을 뒤집으면서 이랬다저랬다 하니 약만 오른다”고 했다. 직장인 박모(36)씨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 정책을 펴는 건지, 그저 ‘방역을 위한 방역’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