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 머크사의 먹는 코로나 치료제 라게브리오(성분명 몰누피라비르) 10만명분을 이번 주부터 순차적으로 들여오기로 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21일 “코로나 확진자 증가에 따라 먹는 치료제인 팍스로비드 사용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 11일 국가감염병임상위원회에서 팍스로비드를 쓸 수 없는 환자에게 라게브리오 도입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어 “지난 3일 WHO(세계보건기구) 치료 가이드라인에서도 라게브리오 사용을 제한적으로 권고했다”는 설명을 달았다. 이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늦어도 24일까지는 이 약의 긴급사용승인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식약처 허가가 나지도 않았지만 일단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질병청은 지난해 11월 17일 라게브리오의 긴급사용승인을 식약처에 요청했지만 식약처는 4개월 넘게 승인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왔다.
라게브리오는 팍스로비드보다 먼저 개발된 먹는 코로나 치료제다. 지난 연말 팍스로비드 도입을 발표할 당시 정부는 라게브리오 24만2000명분에 대해서도 선구매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초 50% 수준으로 알려졌던 입원·사망 위험 감소율이 최종 30%로 하향 조정되고, 국내외에서 암이나 기형 유발 가능성 등 안전성 논란도 제기되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에선 도입이 미뤄졌다. 프랑스 보건 당국은 구매 계약을 모두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에선 지난해 12월 팍스로비드와 라게브리오 사용을 모두 승인했다. 식약처는 지난해 12월 22일 질병청이 긴급사용승인을 신청한 팍스로비드에 대해선 신청 닷새 만에 승인했다. 당시 식약처는 “이미 11월 10일부터 화이자에서 자료를 받아 사전 검토를 시작했다”고 해명했지만, 당시 12월 22일에 미국 FDA가 팍스로비드 사용을 승인하자 질병청이 부랴부랴 신청하고 식약처가 이를 5일 만에 승인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가 뒤늦게 이달 말까지 라게브리오 도입을 추진하고 있으나 효과는 미지수다. 라게브리오 사용을 놓고는 의료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확진자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데 쓸 수 있는 치료제는 부족한 상황”이라며 라게브리오 사용 승인을 촉구했다. 효과성 논란 등이 있다고 하나 일단 승인해놓고 현장 상황에 맞춰 쓸 수 있는 방안들을 논의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팍스로비드보다 낮은 효과성과 부작용 가능성을 고려할 때 긴급승인이 나더라도 현장에서 실제 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염호기 인제대 서울백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임상 시험에선 물론이고 실제 현장에서도 95%가량 효과를 발휘하는 팍스로비드에 비해 라게브리오는 약효가 절반밖에 안 난다”고 했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이미 효과가 검증됐고 안전성 면에서도 부작용이 거의 없는 팍스로비드가 있는데 굳이 라게브리오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팍스로비드는 그러나 지난 14일부터 방역 당국이 처방 기관을 확대하면서 처방량이 크게 늘어나 물량 부족을 우려하는 상황이 됐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 13~19일 1주간 팍스로비드 사용량은 3만9494건으로 직전 주인 6~12일 1만6832건과 비교해 2.3배로 급증했다. 20일 기준 남아있는 팍스로비드가 7만6000명분이고, 일 평균 확진자 20여 만명 가운데 20%가 60세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2주 내 물량이 동날 판이다. 21일 질병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사망자가 급증해 이달 셋째 주 사망자는 1957명으로 집계됐다. 직전 주 1348명 대비 45.2% 증가했다. 코로나로 인한 일 사망자도 닷새 연속 300명을 넘었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유일한 먹는 치료제인 팍스로비드가 추가로 언제, 얼마나 들어올지도 감감한 상태다.
그런 와중에 돌연 정부가 승인을 보류하던 라게브리오에 대해 “이번 주 중 도입”을 발표하니 ‘뒷북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백신 도입 때처럼 ‘외국의 부작용 사례를 보고 도입 여부를 결정한다’는 정부의 보신주의 행태가 번번이 뒤늦은 대응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일부 전문가가 “팍스로비드는 병용 금기 약물이 많아서 라게브리오를 대안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했지만 방역 당국이 무시했다는 것이다.
팍스로비드 고갈에 따른 병상 대란 우려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정재훈 가천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3월 말~4월 초 위중증 환자가 최대 2200명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예측했는데 실제론 그보다 적게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팍스로비드의 중증화 예방 효과 덕분”이라며 “그런데 팍스로비드가 고갈될 위기에 처하면서 중증화 규모가 커질 위험에 처했고 병상 포화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에 감염 추세선을 다시 꺾으려고 라게브리오를 긴급 도입하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라게브리오 효과 우려에 대해 정은경 청장은 “미 FDA가 작년 12월 긴급사용승인을 할 때 입원 또는 사망률을 30% 정도 감소시켜주는 것으로 나왔다, 또 WHO 치료 가이드라인에선 입원을 46% 감소시키고 인도에서 최근 시행한 임상 3상 시험에선 65% 줄인다 등 효과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있는 상황”이라며 “식약처가 그런 부분들을 감안해 긴급사용승인을 검토할 것”이라고 답했다. WHO는 이달 어린이를 포함해 젊고 건강한 환자, 임신부나 수유 중인 여성은 제외하고, 입원 위험이 높은 고위험 경증 환자에게만 조건부로 라게브리오 복용을 권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