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고교 1학년생 이모(16)군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픈 어머니를 돌봤다. 수십 가지 약을 매일 챙겼고, 식구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와 청소를 했다. 악물고 버텼지만, 불안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왔다. 중1 때는 ‘내가 학교에 있으면 우리 엄마는 누가 돌보지’란 불안감이 갑자기 밀려와 조퇴를 한 적도 있었다. 이군은 “‘아이’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면서 “간병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해서 너무 힘이 든다”고 했다.
장애·질병 등에 시달리는 부모·조부모를 돌보는 청년들, 이른바 ‘영케어러(young carer·가족 돌봄 청년)’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상당수는 기존 복지 수혜 대상에서 제외돼 있는 데다, 어릴 때부터 돌봄에 투입되면서 학업·진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빈곤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도 첫 실태조사를 마치고 이달 중 대책을 발표하기로 했다.
‘영 케어러’란 장애, 정신·신체적 질병, 알코올중독 등 다양한 문제를 가진 부모를 돌보는 10대 후반~20대 중반 아동·청년을 뜻한다. ‘가족 돌봄 청년’으로도 불린다. 영국에선 1990년대부터 논의가 시작되고 2014년 관련 법이 만들어졌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영케어러 문제는 지난해 5월 대구 ‘20대 청년 간병 살인’ 사건으로 부각됐다. 요양병원에서 퇴원한 50대 아버지를 간병하다 방치해 숨지게 한 20대 청년 사건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가족 돌봄 청년 비극으로 관심을 받았다. 이 청년은 “2시간마다 아버지 몸의 체위를 변경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었고, 이렇게 계속 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 3월 대법원은 이 청년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영케어러’가 처한 현실은 혹독하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산 정모(가명)씨는 할머니가 치매를 앓으면서 순식간에 ‘영케어러’가 됐다. 정씨는 “할머니가 음식 쓰레기를 밥솥에 넣는다든가, 대변을 온 집 안에 다 바르고, 집에 불까지 냈다”고 했다. 인턴이나 자격증 따기 등 평범한 청년들이 누리는 다양한 경험조차 영케어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월 ‘가족 돌봄 청년 지원 대책’을 수립하고, 지난달부터 이달 초까지 약 한 달간 전국의 중·고등학생과 학교 밖 청소년,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영케어러’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중고교생부터 만 24세까지 영케어러에 대한 기존 복지 서비스 확대, 영케어러 보조금 지급 등 다양한 지원 정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뉴질랜드·스웨덴 등 서구 국가 ‘영케어러’ 규모는 청소년 인구의 약 5~8% 규모. 우리 청소년(만 11~18세) 인구에 대입해서 계산하면 우리나라에도 18만~29만명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다. 이번 실태조사에선 초등생 영케어러는 제외됐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 등 여야 의원 11명이 영케어러에 대한 국가 지원을 규정한 ‘청소년복지 지원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지만, 7개월째 계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