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전 9시 5분 경기도 용인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74세 남성 A씨가 근무 중이던 의사 목을 흉기로 찌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A씨는 사건 발생 나흘 전인 11일 자정 해당 병원 응급실에서 숨진 70대 여성 환자 남편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 아내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고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결국 숨졌으며 A씨는 아내에 대한 의사 조치가 미흡했다고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현장에서 A씨는 아내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욕설을 하고 소란을 피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9일 소송에 패한 사람이 상대 측 변호사에게 앙심을 품고 불을 질러 7명의 사망자를 낸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참사’가 터진 지 일주일도 안 돼 이번엔 의사를 상대로 한 분노 범죄가 발생한 것이다.
A씨는 범행 이틀 전 응급실을 찾아와 병원 직원에게 피해 응급의학과 전문의 근무 날짜를 확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당일에는 ‘아내의 담당 의사를 만나고 싶다’며 응급실 안까지 들어왔고, 의사 앞에서는 ‘먹을 것을 선물하겠다’며 준비한 낫을 갑자기 꺼내 목을 내리치는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의사는 뒷목 바로 밑 10㎝를 베였으나 즉시 응급 수술을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경기도 용인동부경찰서는 살인미수 혐의로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수원지방법원 박정호 영장전담판사는 16일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도주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은 구속된 A씨를 상대로 자세한 경위를 조사할 방침이다.
의료계는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대한의사협회는 17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기관 내에서 진료 중인 의료인에 대한 폭행·상해는 어떤 이유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 행위”라며 “살인 의도가 명백해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규탄했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은 “피해 의사가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습 당시 충격으로 심각한 불안과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며 “의료기관은 사람을 살리는 곳인데 살인미수라는 불행한 사건이 자행돼 매우 유감”이라고 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도 17일 긴급 성명을 통해 “아직도 우리 사회는 환자와 보호자를 무한한 온정주의의 눈길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로, 망자의 보호자가 설령 난폭한 행동을 보인다 하더라도 단지 일시적 감정의 표출로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을 것이고, 경찰에 신고했다 하더라도 법적 조치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당시 난동을 제압하고 법적인 격리 조치를 미리 취했다면 이런 불상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또 “결과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되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의사에게 돌아온 것은 감사의 표현이 아니라 살해 의도가 가득한 낫질이었다”고 꼬집었다.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를 흉기로 찔러 다치게 하거나 숨지게 하는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는 드물지 않다. 지난 2018년 12월 서울 강북삼성병원에서 임세원(당시 47세) 교수가 정신과 진료 도중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한 이후로 의료기관 내에서 상해·중상해·사망이 발생했을 때 강력히 처벌하는 법안이 제정됐다. 하지만 그 후 1년 8개월 만인 2020년 8월 부산 북구 한 병원에서 60대 환자가 원장 김모(당시 60세)씨를 16차례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는 일이 또 벌어졌다. 같은 해 6월 전북 전주의 한 병원에서는 22세 남성이 진료실에 난입해 진료 중이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폭행했다. 2019년 4월에는 경남 지역 정신질환자의 의료기관 방화 사건, 10월에는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의 흉기 난동에 의해 정형외과 의사의 엄지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건, 11월에는 부산에서 병원 직원을 대상으로 한 흉기 난동 사건, 12월에는 충남 천안 한 대학병원에서 유족들에 의한 의사 상해 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은 “응급의료 현장 폭력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이고, 응급의료인들에게 폭력은 너무나도 익숙한 일상이 돼버렸다”면서 “사실 지금까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은 여러 차례 개정됐고 폭력에 대한 처벌 수위도 계속 높아져 응급의료 현장에서 폭행 사건이 발생하면 일반 폭력 사건보다 양형 기준은 2배가 넘고 형량 하한제나 심신미약 무관용 원칙 등 다양하고 강력한 조치들을 시행할 수 있지만 실제 진료 현장에서 느끼는 안전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처벌이 강화되다 보니 경찰이나 검찰이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입건하는 일 자체를 꺼리고, 이는 응급의료인에 대한 폭력이 발생해도 처음부터 기소 자체를 주저해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계 최전선에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와 병원을 향한 이 같은 분노 범죄는 왜 끊이지 않는 것일까.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회심리학적으로 전문가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경우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분노가 커질 수 있고 사람에 따라 이를 통제하지 못한 채 일종의 공격적인 행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테면 “‘대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은 상대편 변호사를 탓하며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해 범죄를 저지른 거여서 보복 범죄 성향이 강하고, 이번 사건은 ‘내 의사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그에 따른 분노를 표출한 분노 범죄”라는 것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번 의료계 낫 사건은 전형적인 ‘반사회적 태도로 인한 범죄’”라고 설명했다. “불만과 분노는 늘어나는데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그저 단선적인 태도로 반사회적인 불만을 있는 그대로 터뜨려 버리는 폭력 범죄”라는 것이다.
의료계는 더 강력한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필수 의협회장은 “의료인 폭력 사건을 막겠다고 강구한다는 대책들이 대피 뒷문, 비상벨, 안전전담요원 등인데 이는 오히려 의료기관에 대한 규제로 돌아올 뿐 실효성이 거의 없다”며 “의료기관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엄연히 공익적 영역이기에 정부가 의료인에 대한 안전과 보호를 전적으로 부담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법무법인 한별 전성훈 변호사는 “금속 탐지기와 청원 경찰을 두는 공항, 법원처럼 필수 의료기관에도 이 같은 최소한의 안전보호 장치를 마련해 사고를 예방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의료인들은 진정 바라는 것은 “안전한 진료 환경”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형민 응급의사회장은 “폭력 사건이 이미 벌어진 뒤의 조치는 아무 소용이 없다”면서 “단순한 보여주기 식 대책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부터라도 정부가 현장 전문가들과 손잡고 재발 방지 및 개선 방안에 대해 논의의 장을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이번에 일이 터진 곳은 200~300병상 정도 준종합병원”이라며 “의료진과 보안인력이 충분한 서울 지역 ‘빅5(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서울성모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에서는 이런 일이 절대 안 생긴다. 공공이 주의를 기울여 필요한 인력을 필수 인력으로 보강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