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약사회 회원들이 20일 오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앞에서 열린 약 자판기 저지 결의대회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22.6.20/연합뉴스

정부가 화상(畫像)투약기, 이른바 ‘약 자판기’ 운영을 한시적으로 허용하기로 했다. 야간이나 공휴일 등 약국이 문 닫았을 때 환자들이 감기약·소화제 등 일반의약품을 살 수 있도록 한 자판기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화상 모니터로 약사와 영상으로 통화한 후, 증상에 맞는 약을 구입할 수 있다. 약사가 원격으로 복약(服藥) 지도를 하고, 약을 지정해 준다는 점에서 일반 자판기와는 다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20일 제22차 정보통신기술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서 화상투약기 스타트업 업체 쓰리알코리아의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 등 규제특례 과제 11건을 승인한 데 따른 것이다. 이번 결정에 따라 화상투약기는 서울 지역 10곳에 설치돼 3개월간 시범 사업을 한 뒤 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확대 여부가 결정된다.

이에 대한약사회가 거세게 반발하며 전면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약사회는 21일 ‘약 자판기 조건부 실증특례 전면 거부’ 성명을 내고 “단 하나의 약국에도 약 자판기가 시범 설치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약사회는 화상투약기 사업 허용이 국민건강권을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면 원칙이 훼손돼선 안 되고, 의약품을 잘못 투약해 부작용이 증가하는 등 약 자판기로 발생할 문제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약국 앞 약 자판기를 허용할 게 아니라 공공 심야약국 운영을 확대해 의약품 접근성을 개선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소비자의 선택권과 편의성, 코로나 유행으로 촉발된 비대면 시대에 약 구입 절차 간소화 필요성 등도 제기되고 있어 양측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화상투약기 운영은 불법이었다. 약사법상 약사는 약국이 아닌 장소에서 의약품을 팔 수 없기 때문이다. 화상투약기는 쓰리알코리아의 박인술 총괄약사대표가 2013년 개발했다. 그해 인천 부평의 한 약국에서 시범 운영했으나 약사들 반발로 3개월여 만에 철수했다.

박 대표는 이날 본지 통화에서 “국내에서 화상투약기가 주목받은 건 새벽 시간 응급실에 갈 여력이 없는 환자들 때문”이라며 “전문 약사에 의해 모든 게 관리되기 때문에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가정상비약보다 안전하다”는 것이다. 약이 잘못 전달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약사와 환자의 대화 내용을 6개월간 보관하고, 결제는 신용카드로 한다. 원격제어 시스템으로 기기 내 온·습도를 관리한다. 박 대표는 “약사회 주장처럼 공공 심야약국을 확대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지금도 하룻밤 3시간 운영에 정부가 월 300만원씩 지원하고 있는데 그걸 확대하면 재정 부담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반문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영국, 스웨덴 등 해외에선 약 자판기가 보편화해 있고, 약사만 판매기를 운영해야 한다는 규제도 없다. 미국 최대 약국 체인인 CVS 파머시는 ‘셀프 혁신’ 차원에서 일반의약품과 건강보조 제품 수십 가지가 들어가 있는 약 자판기를 도입했다. 주(州)별로 의사 처방약 공급·판매기, 낙태·피임약 판매기 등이 다양하게 허용돼 있어 공항이나 대학 캠퍼스 등 공공장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스웨덴은 2011년 일반의약품에 한해 자판기 판매를 허용하고, 약사가 아니어도 기기를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자판기가 음성 안내로 각 약품에 대해 설명해 주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신용카드와 주민번호만 입력하면 약사와 영상 통화를 하지 않고도 약을 살 수 있다. 독일·영국 등에선 터치스크린 방식 판매기가 등장했다. 환자가 스크린 속 의약품을 클릭하면 약값과 복약 정보 등이 화면에 뜨고, 약사 상담 후 로봇이 조제해주는 약을 받아간다.

국내 비대면 진료 플랫폼 업체 닥터나우가 환자들이 직접 약을 고를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았으나 의사들 반발에 부딪혀 지난 16일 한 달 만에 중단했다. 이번 화상투약기도 약사들 저지로 뿌리도 못 내린 채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는 기존 업계 반발과 각종 규제에 가로 막혀 보건 의료 산업의 혁신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글로벌 원격의료 시장은 704억 달러(91조원)로 성장했지만 한국은 2020년부터 비대면 진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특별 조치였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비대면 진료를 법제화하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와 칠레, 터키 등 6국뿐이고, 약 배송이 제한된 국가는 4국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