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의료 접근성이 첫손에 꼽히는 나라다. 하지만 환자 생명을 살리고 중병을 고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필수 의료, 이른바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내외산소)가 무너지고 있다. 지난달 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 중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가 제때 수술을 못 받아 사망한 사건 이후 의료계 등 일선 현장에서는 “위기에 처한 필수 의료의 민낯이 드러났다”며 “의사 수 확대 등 의료 기반을 지킬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흉부외과는 당장 내후년부터 지금보다 적은 인력으로 계속 늘어나는 수술 수요를 감당해야 한다. 흉부외과 의사 수가 줄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해 흉부외과를 택한 전공의는 23명으로, 확보율이 35%에 불과하다. 정의석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 기획위원장은 “1994년만 해도 57명, 2007년엔 47명이었는데 지금은 전공의를 다 채운 병원이 전국에 다섯 개밖에 없고, 전공의가 한 명이라도 있는 병원도 절반밖에 안 된다”고 했다. 특히 30·40대 젊은 전문의 부족이 심각하다. 정 기획위원장은 “연령별로 50대(425명)가 제일 많은데, 이들은 15년 후면 다 사라진다”며 “고령화로 심장과 폐암 수술은 더 늘 텐데 30대(142명)와 40대(312명)를 더해봐야 454명뿐이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내년부턴 전문의로 들어오는 숫자보다 은퇴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더 심각한 ‘구인난’을 겪고 있는 과는 소아청소년과다. 2019년 80%였던 전공의 확보율은 2020년 68.2%, 지난해 34.4%, 올해 27.5%로 급락했다. 저출산에 코로나까지 겹쳐 환자가 줄면서 ‘미래가 없는 전공’이란 인식이 퍼진 탓이다.
본지가 내외산소 각 학회 이사장 등 의료 전문가 20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 이들이 지적하는 문제의 핵심은 의사 수 부족이 아니라 ‘힘들고 위험 부담이 크지만 돈벌이는 잘 안 되는’ 분야의 의사가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이우용 대한외과학회 이사장은 “아산병원 사건으로 이슈가 된 신경외과의 경우, 전공의가 모자라는 것은 아닌데, 뇌혈관 개두술(開頭術) 분야는 기피하고, 돈이 되는 척추 위주로 전공의들이 몰리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내외산소 중에서도 대동맥 질환이나 암 등 기피 분야를 떠받치는 의사들은 나날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전공의 확보율에 “우린 멸종위기종”이라며 위기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올해 내과 전공의 확보율은 96.2%로 그나마 나은 편이다. 김영균 대한내과학회 이사장은 그러나 “내과도 2017년 80%까지 확 준 적이 있다”며 “전공의 수련을 3년제로 바꾸고, 입원전담전문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차츰 회복해 2020년 94.6%, 지난해 91.8%로 올랐다”고 했다.
올해 전공의 확보율이 30% 이하로 떨어진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하반기 모집에서 가톨릭중앙의료원(10명), 세브란스병원(8명), 한양대병원(5명) 등이 뽑겠다고 나섰지만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전공의 부족은 ‘다른 전공의 수련 포기·사직, 교수들 야간 당직→의료진 전체 번아웃(burnout·극도의 피로와 의욕 상실)→전공의 지원율 하락’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응급·중증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소아 응급실과 신생아 중환자실의 정상 가동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에 따르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부족으로 전국 상급 병원 96곳 중 소아 응급실을 24시간 정상 운영하고 있는 곳은 38.5%(37곳)에 불과하다.
소아 응급 센터를 폐쇄해 소아 환자는 아예 받지 않거나 낮에만 받는 응급실이 늘어나는 추세다. 밤에는 응급실에 가도 아이가 치료받을 수 없는 곳이 많다는 얘기다. 서울 한 대학 병원 교수는 “이 상태라면 의사 부족으로 2~3년 내 ‘아동·청소년 건강’이라는 국가 안전망이 흔들릴 것”이라고 했다.
산부인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공의 확보율이 최근 60~70%까지 떨어졌는데, 저출산과 더불어 다른 과에 비해 ‘법적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산부인과는 분만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위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의료진 과실이 없는 사고에서도 소송당할 가능성이 크다. 2019년 대한산부인과학회 설문 조사에 따르면, 산부인과 전공의 57%가 “전문의 자격을 따도 분만은 받지 않겠다”고 답했다.
국내 분만 병원은 2007년 1027곳에서 지난해 6월 474곳으로 쪼그라들었다. 지방을 중심으로 이른바 ‘분만 취약지’가 늘고, 산모와 태아가 위험해지는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산부인과학회는 “분만 중 무과실 의료 사고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전문의는 “현행법상 100~300병상 종합병원은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중 3개 과만 개설해도 되는데, 많은 병원이 경영 적자를 초래할 가능성이 큰 산부인과 운영을 포기하고 있다”며 “필수 의료 4과 개설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