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와 난치병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수원 세 모녀 사건’이 22일 알려지자 정부·지자체의 복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이웃 접촉도 되지 않는 이른바 ‘고립된 위기 가구’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작년 기준 기초연금·생계급여·아동수당 등 정부의 현금성 복지 예산 규모는 110조원에 이른다. 하지만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에도 해마다 ‘복지 사각지대’에서 비슷한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경기 수원시 다세대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60대 여성과 40대 두 딸은 오랜 기간 암 등 난치병과 생활고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월 1만원대 건강보험료를 16개월째 못 내면서도 긴급복지·생계비 지원 등을 신청하지 않았다. 도움을 줄 친척이나 이웃도 없었고, 현 거주지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지자체도 이들의 상황을 몰랐다. 채무 문제 등이 원인이 됐으리란 추측만 나온다.
수원 세 모녀처럼 월 5만원 이하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체납해 ‘생계형 체납자’로 분류되는 가구는 작년 6월 기준 73만 가구에 달한다. 1년 이상 거주지가 파악되지 않아 행정안전부에 ‘거주 불명자’로 등록된 국민도 작년 말 기준 24만명이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립 위기 가구’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개인적 이유로 전입신고·출생신고 등을 하지 않아 정부·지자체의 복지 시스템에서 누락되고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고통받는 사례가 적잖다. 작년 7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서울 강남구 다세대주택 반지하에서 목숨을 끊은 모녀도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작년 12월 제주에선 10~20대 세 자매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학교 교육, 병원 치료도 못 받으며 자라온 사연이 알려졌고, 작년 1월 인천에선 친모에게 살해당한 A양이 출생신고 없이 8년간 방치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모두 이웃 등 외부와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주소지와 거주지가 다를 경우 찾아내기 어렵다지만 정작 거주지가 불안정한 이들이 가장 취약한 계층이라는 게 모순”이라며 “수면 아래 있던 사각지대가 새로 드러났는데, ‘찾아가는 복지 시스템’ 정비와 관련 인력 보강, 시민들의 동반 의식을 통해 빈틈을 메워나가야 한다”고 했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 예산 556조원 가운데 현금성 복지 예산 규모만 110조원(약 20%)에 이른다. 국민연금 등 4대 연금 급여 지급액을 제외해도 소득·나이, 구직 활동 등에 따라 지급하는 기초연금(14조9414억원), 구직급여(11조3486억원), 생계급여(4조6062억원), 아동수당(2조2191억원) 등의 규모가 상당하다. 정부는 2014년 2월 생활고에 시달리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이라며 현금 70만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구 세 모녀 사건’ 이후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도 강화했다.
하지만 복지 사각지대에서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고립 위기 가구’ 사례는 끊이지 않고 있다. 2019년 관악구 탈북 모자 사건과 성북구 네 모녀 사건, 재작년 60대 어머니가 집에서 숨진 뒤 30대 발달 장애 아들이 노숙 생활을 하며 방치된 서초구 모자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생계 지원 신청, 장애인 등록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복지 제도를 제대로 신청하지 못했고, 숨진 지 1~5개월이 지난 뒤에야 발견됐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사례가 끊이지 않는 이유로 ①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과 지원 인력 한계 ②다양하고 복잡해지는 복지 제도 ③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혜택을 못 받는 ‘신청주의’ ④코로나 사태 이후 지역사회 관계망 단절을 꼽는다. 실제 정부의 사회보장 정보 시스템 ‘행복e음’을 통해 지자체와 각 기관이 가구별 단전·단수, 사회보험료 체납 등 34가지 정보를 공유하고 직접 방문해 발굴한 위기 가구는 2017년 29만8638명에서 지난해 133만3927명이 돼 4배 이상으로 늘었다. 하지만 각 지자체 전담 인력은 2017년 5954명에서 작년 6월 1만1671명으로 느는 데 그쳐 1명이 담당하는 위기 가구 수는 같은 기간 두 배가 됐다.
실제 수원 세 모녀 역시 건강보험료를 작년 3월부터 연체하자 건강보험공단이 작년 6월부터 격월로 총 8차례 사회보장 정보 시스템 ‘행복e음’에 이들의 체납 정보를 등록해 지자체와 공유했다. 하지만 이 정보를 공유한 지자체는 모녀가 실제로 사는 수원시가 아니라 화성시였다. 모녀가 지인의 집이 있는 경기 화성시 기배동에 주민등록을 뒀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성시에만도 건강보험료 10만원 미만, 3개월 연속 체납 중으로 등록된 위기 가구 후보군이 1만명 이상이어서 세 모녀는 지난달에야 ‘우선순위 위기 가구 후보군’에 들었다. 이후 이달 3일 기배동 주민센터 담당 직원이 방문했지만 모녀의 소재 파악은 이뤄지지 못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막대한 노력과 비용으로 위기 가구 발굴 사회 안전망을 구축했지만 그 틈을 메우는 건 결국 사람”이라며 “현재 담당 인력으로는 제도의 사각지대를 메우기 어렵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정보 약자’에 속하는 고령층·저소득층이 복잡한 복지 제도 내용을 잘 몰라서, 또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 스스로 신청을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65세 이상 노인 대상 기초연금은 작년 12월 기준 수급 대상자가 618만4500명이었는데, 실제 수급자는 597만3000명이었다. 대상자의 3.4%는 받을 수 있는데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기준 중위 소득 30% 이하에게 지급하는 생계급여는 2018년 123만명이 받았지만 34만명은 못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는 “결국 복지 서비스를 잘 알리고 고립 위기 가구의 실거주지를 찾는 데 행정력을 적극적으로 투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지적이 잇따르자 복지부는 23일 “복지 사각지대 발굴·지원 종합 대책을 재점검해 안타까운 사례를 조기에 발견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행정안전부 등 관계 부처와 협력해 취약 계층 연락처 연계, 복지 정보 안내, 홍보 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다음 달부터 빅데이터 활용 위기 가구 발굴 시스템에서 활용하는 위기 정보(현 34종)에 중증 질환 산정 특례, 요양 급여 장기 미청구, 장기 요양 등급, 맞춤형 급여 신청, 주민등록 세대원 정보를 추가해 총 39종으로 늘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