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붕괴 위기에 놓인 ‘필수의료’ 분야를 살리기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놨다. 지역별 중증응급의료센터를 늘리고, 지방에선 의사가 없어 응급수술을 못 하는 일이 없도록 공동 당직 의사제를 두도록 했다. 점점 사라지는 지방 소아청소년과나 산부인과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 지원도 확대한다.
보건복지부는 31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중증·응급 환자와 분만·소아 환자들이 언제라도 사는 곳과 가까운 병원에서 제때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 체계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대책은 크게 권역 중증응급의료센터 최대 20곳 확충, 지역 순환 당직 의사제 도입, 산부인과 등에 공공 정책 수가(酬價) 적용, 소아암 지방거점병원 5곳 등 소아 환자 거점 의료기관 확보다. 주변에 필수의료 분야 치료 시설이 없어 치료 적기(適期)를 놓치거나 멀리 떨어진 병원까지 원정 진료를 가야 하는 환자가 점점 많아진다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그동안 수도권에만 주요 의료 인프라가 쏠리고, 업무 강도는 높고 보상이 적은 필수의료에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지방 의료 체계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 바 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앞으로 필수의료 기반을 다지기 위해 추가 대책을 더 내놓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서울 아산병원에서는 뇌출혈로 쓰러진 간호사가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하고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의료기관 종사자조차 급한 수술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인 바 있다. 여기에 필수의료 분야로 통하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자가 해마다 줄면서 머지않아 ‘진료 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깊어졌다. 이 같은 불안감을 반영해 정부가 중증·응급·분만·소아 환자를 위한 의료 인프라 강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지역 응급실 기능 강화
우선 현재 전국 40곳 ‘권역 응급의료센터’를 ‘권역 중증응급의료센터’로 개편하고 규모도 50~60곳으로 늘리기로 했다. ‘권역 중증응급의료센터’는 인력·시설 현황보다는 뇌출혈·중증외상·심근경색 등 중증 질환을 치료할 역량이 있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해 지정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급성심근경색 응급 환자 11.2%가 이송된 최초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지역에 따라 병원은 많지만 야간에 당직 의사가 없어 환자가 이리저리 헤매는 일을 막기 위해 주요 응급 질환 수술을 할 수 있는 당직 의사를 야간에 시·도 등 지역별로 최소 1명 이상 확보하는 ‘(야간) 순환 당직제’도 올해 시범 도입한다. 병원 자체적으로 모든 의료 분야에서 24시간 당직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했다.
정부는 권역 중증응급의료센터 개편과 순환 당직제 등을 통해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추가 이송 없이 거주지 가까운 병원에서 응급처치와 검사부터 치료까지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필수의료 분야 수가 인상
필수의료 분야가 일은 고되고 보상은 적다는 지적에 대해선 ‘공공 정책 수가’를 도입해 해소하기로 했다. 응급 수술이나 분만 같은 필수의료 수가를 올려주는 것이다. 공공 정책 수가는 치료 성격이나 지역 특성을 고려해 정할 계획이다. 응급 수술·시술은 현재 평일 주간 때엔 수가를 추가로 50%만 받을 수 있는데, 이를 100%로 늘릴 계획이다. 의사들이 근무를 꺼리는 평일 야간과 공휴일 주간, 공휴일 야간은 이를 더 늘려 150~200%까지 확대한다.
신생아 분만을 담당하는 산부인과는 현행 수가에 ‘지역(광역시 제외 시·군 기준) 수가’를 100% 추가하고, 의사에게도 의료사고 예방 노력에 대한 ‘안전 정책 수가’ 100%를 더해주는 방안을 추진한다. 지방 산부인과 분만 수가가 최대 3배 오르는 것이다. 실제 출산율 하락과 의료사고 부담 등으로 분만이 가능한 병원 규모는 2018년과 2021년 사이 전국 145곳에서 132곳, 의원은 279곳에서 218곳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250개 시·군·구 중 산부인과가 없는 분만 취약지는 2022년 말 기준 105개로 전체의 42%에 달한다.
◇소아 환자 거점 의료기관 확보
저출생 영향으로 위축되고 있는 소아과 지원책도 포함했다. 소아암 지방거점병원을 5곳 추가로 지정, 소아암 환아·보호자들이 수도권 등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되게 할 방침이다. 수도권에 몰려 있는 소아 전문 응급의료센터도 늘린다. 현재 소아 전문 응급의료센터는 서울 3곳, 인천과 경기, 대구·경남·충남에 각각 1곳씩 8곳이 있다. 이를 센터가 없는 권역을 중심으로 내년까지 4곳 더 확대할 예정이다.
전국 9곳에 있는 중증 소아 전문 치료기관 어린이 공공전문의료센터에 대해선 수익성 압박 없이 중요한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재정 지원을 확대한다. 더불어 상급 종합병원을 3년마다 재평가·지정할 때 소아 응급진료를 하는지 확인, 소아 응급 진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상급종합병원에 지정되면 가산 수가를 받을 수 있어 병원엔 평가 결과가 중요하다.
◇시기나 예산 확보 계획은 미정
다만 정부는 이번 필수의료 지원책을 언제까지 어떻게 예산을 마련해 구현할지는 아직 뚜렷하게 일정을 내놓지 못했다. 낭비성 건강보험 지출을 줄이고 국고 지원을 늘리겠다는 구상이지만 얼마나 예산이 필요할지 설명하지 않았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고 추진 과제는 재정 당국과 협의하되 기본적으로 구조 조정을 통해 확보하겠다”면서 “담뱃세나 주류세를 활용할 방안은 검토하지 않다”고 말했다. 의료 현장에서는 “공공 정책 수가 정도 지원해서는 필수의료가 직면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회의론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