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속초의료원에 단축운영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있다./뉴스1

강원도 속초의료원은 최근 4억원 넘는 연봉을 제시하며 응급의학과 전문의 채용에 나섰다. 원래 5명이던 이 병원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가운데 3명이 올 들어 빠지면서 응급실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2명이 지난달 말 그만뒀고, 1명은 이달 말 사직 예정이다. 응급실의 경우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전문의가 최소 5명은 있어야 24시간 돌아간다. 속초의료원은 의사가 부족해지자 지난 1일부터 목~일요일 주 4일만 응급의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월·화·수요일은 한밤중에 아프면 안 되는 날”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응급실 정상화를 위해 속초의료원은 응급의학과 전문의 1차 채용 공고를 냈지만 마감일인 지난 6일까지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이에 의료원은 연봉 상한선을 국내 공공 병원 전문의 최고 수준인 4억2000만원으로 올렸다. 기존 연봉보다 1억원이나 높인 것이다. 2차 마감일은 21일이다. 하지만 연봉 인상으로 의사를 채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일까지도 지원자가 없기 때문이다. 의료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지방 공공 병원은 평소에도 인력이 모자라 의사 한 명이 온갖 책임을 떠맡는 데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가 많아 의사들이 근무를 꺼린다”고 했다. 다른 지방 공공 병원도 비슷한 처지다.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은 최근 응급의학과 전문의 모집 공고에서 3억5000만원, 경기도의료원 포천병원은 3억2000만원을 연봉으로 각각 제시했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의 의사 부족 현상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전국 지방 의료원 35곳의 의사 결원율은 14.5%로, 정원이 10명이라면 한두 명은 항상 모자란 상태다. 응급의학과와 산부인과 등 필수 진료과 전문의를 모두 갖춘 의료원은 8곳뿐이다. 충주의료원은 의사 정원이 33명인데 28명만 진료를 보고 그나마 5명은 곧 정년이다. 경남 합천보건소는 공중보건의 30명 중 20명이 오는 3~4월 중 한꺼번에 복무 만료로 교체가 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들이 복무 만료에 앞서 차례로 연가를 쓰면서 의료진 공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는 4월 인력 충원 때까지 남은 공보의들은 기존의 약 4배에 달하는 보건지소들을 순회하며 감당해야 한다.

의사 부족으로 단축 운영 중인 속초의료원 응급실을 정상화 하기 위한 강원도와 설악권 자치단체의 간담회가 지난 2월 10일 의료원 회의실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의사들이 지방 공공 병원을 기피하는 것은 근무 여건이 열악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역 의료원 응급실은 대개 의사 한 명이 하루 24시간 꼬박 근무하고 연이틀을 쉬는 구조다. 그런데 만성적인 인력 부족 탓에 동료 의사 중 한 명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이틀에 한 번 당직이 돌아오고,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쉬는 날에도 호출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또 수도권 대형 병원처럼 보안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한밤중에 취객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거나 진료를 방해해 응급실 업무가 마비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일부 공공 의료원은 비(非)의료인 출신이 원장으로 임명돼 오면서 의사들과 마찰을 빚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뜩이나 근무 환경도 열악한데 지방 의료원 조직에 대한 회의감이 들면서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의사들도 있다는 것이다.

지역 공공 병원의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연봉이 높다지만 그중 40%는 세금으로 내고 밤낮없이 떨어지는 ‘일 폭탄’을 맞아야 하는데, 3년 정도 하면 병들어 그만두게 된다”고 말했다. 이형민 대한응급의학의사회장(한림대성심병원 응급의학과)은 “일반 직장인보다 근무시간이 3배 많고 업무 강도도 세서 결코 보상이 높다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고 했다. 고액 연봉이 근본 대책은 아니라는 얘기다.

지방 공공 병원의 의료 인력 부족으로 해당 지역 주민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이고 있다. 그렇다고 당장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강원도는 속초의료원 응급실 운영 정상화를 위해 인근 시군 공중보건의 순번제 파견, 도내 타 의료원 응급전문의 파견 등을 자구책으로 고려했다가 설악 권역(속초·고성·양양·인제) 보건소와 공중보건협의회 등에서 “땜질식 운영”이라고 뭇매를 맞았다. 김윤성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학술이사는 “다들 인력이 간당간당해 다른 병원으로 파견을 보낼 여력이 없다”고 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말 ‘필수 의료 지원 대책’을 발표하면서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가 수술도 못 받고 다른 병원으로 다시 이송되는 일이 없도록 집 근처 권역 응급 의료 기관이 최종 치료까지 책임지는 응급 의료 체계를 구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환자를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 구급차가 거리를 전전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병원 간 순환 당직제를 도입하고, 소아암 환자들이 지역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소아암 지역 거점 병원도 지정할 계획이다. 그러나 의료 전문가들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병원에서 환자를 받아줄 의사부터 확보하는 게 급선무인데 쉽지 않은 현실”이라며 “지금과 같은 수도권 쏠림 현상을 해소하지 못하면 지방 의료계는 그나마 쌓아온 의료 역량도 점차 잃는 악순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