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에 사는 고모(41)씨는 지난 20일 새벽 딸이 열이 나자 급히 근처 소아과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 병원이 있는 상가는 오전 7시에 문을 여는 데 이미 10여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이 소아과는 오전 9시부터 진료를 시작한다. 고씨는 “아파트 주변에 소아 진료를 보는 병원이 1곳밖에 없는데, 오전 9시쯤 가면 대기 번호가 벌써 50번이 넘는다”며 “소아과 가는 날은 그야말로 전쟁”이라고 말했다.
의사들의 소아청소년과 기피로 문 닫는 소아과가 늘면서 병원이 문을 열기도 전에 장사진이 생기는 ‘소아과 오픈 런’은 일상이 됐다. 부모들은 육아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어느 소아과 대기 줄이 짧고 언제 접수가 끝나는지 등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접수할 수 있는 소아과는 접수 시작 후 몇 분도 안 돼 접수가 마감되기 일쑤다. 서울 성동구에 사는 김모(33)씨는 “온라인 접수가 시작되고 30초 만에 대기 순서가 40번이 되더니 곧 ‘진료 마감’이라고 떠 결국 예약하지 못했다”며 “다음날 접수가 시작되자마자 열심히 클릭해 겨우 접수를 했지만, 먼저 예약한 사람이 많아 진료받기까지 2~3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예약을 받지 않는 소아과의 경우 이른 아침부터 부모들이 입구에서 낚시 의자 등에 앉아 접수 순서를 기다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정상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을 방문했다가는 ‘접수 마감’이라는 팻말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시내 소아청소년과 병원(의원)은 456곳으로 5년 전 521곳보다 12.5%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저출산으로 환자가 줄면서 병원도 감소했다. 소아청소년과는 ‘미래가 어둡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젊은 의사들이 외면하고 있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확보율은 2020년 68.2%에서 지난해 27.5%로 뚝 떨어졌다.
보건행정 전문가들은 국내 의사 수 자체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보건행정학회에 실린 ‘국내 의사 수요 추계’에 따르면 2025년 필요한 국내 임상 의사는 12만9496명이다. 고령화에 따라 2030년 14만6837명, 2035년 16만3719명, 2040년 17만9288명으로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재 국내 임상 의사 수는 약 11만명이다. 10여 년만 지나도 수요보다 5만명이나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의사 인력 수급 추계’에서도 의대 선발 인원과 의사 1인당 업무량이 현재 수준일 경우 부족한 의사 수는 2035년 2만7232명일 것으로 추산됐다. 예방의학과를 제외한 모든 진료과에서 의사가 부족할 것으로 분석됐다.
현재 국내 의사 한 명당 연간 진찰 건수는 6989건에 달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많다. 환자는 오래 기다려야 하고 진료 시간은 몇 분이 채 되지 않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1차 의료기관의 평균 진료 시간은 4.3분이다. 미국은 22.5분, 영국은 13.3분이었다. OECD 조사 결과 ‘의사의 진료 시간이 충분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75%로 OECD 평균(81.7%)보다 낮았다.
정부는 의사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의과대학 정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증원 규모는 300~500명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는 “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필수 의료를 기피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라는 입장이다. 이광래 인천광역시의사회장은 ”지금 소아과처럼 기피 진료과를 지원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의대 정원을 아무리 늘려도 필요한 의사는 공급되기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