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 서초구의 한 호텔 2층 행사장에 들어서자 ‘소아청소년과 탈출(No kids zone·노키즈존)을 위한 제1회 학술 대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최근 문을 닫으려는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을 대상으로 성인 만성질환, 미용, 통증 클리닉 등의 개업 노하우를 알려주는 자리였다. 수강료는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원은 6만원, 비회원은 30만원이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등 719명이 사전 등록했다. 현장 등록한 의사까지 포함해 800여 석이 가득 찼다.
학술 대회였지만 입시 설명회 분위기였다. 첫 순서 제목이 ‘성인 진료의 기본 중 기본, 1타 강사님이 족집게 강의하는 고지혈증의 핵심 정리’였다. 강사로 나선 내과 의사는 “여기 있는 소아과 선생님들이 내일부터 바로 진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설명하겠다”며 내과 진료 매뉴얼을 설명했다. 소아과 의사들은 수험생처럼 노트에 메모해가며 강의를 들었다. 강의 중 질문은 메신저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받았다. 한 소아과 의사에게 어떤 강의를 집중적으로 들을 것인지 묻자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다”며 “오늘 미용, 통증, 성인 질환 등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워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후 강의 제목은 ‘진료실에서 바로 적용하는 보톡스 핵심 포인트’, ‘폐 기능 검사 기계를 활용한 성인 천식의 진단과 치료의 실제’, ‘당뇨의 진단과 관리’, ‘섬세한 소아과 전문의들이 잘할 수 있는 하지정맥류의 진단과 치료의 실제’, ‘비만 치료의 실전 적용’ 등이었다. 내과, 피부과, 가정의학과, 흉부외과 등이 주로 진료하는 질환에 대한 내용이다. 이날 강의는 현재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이 바꾸고 싶어하는 진료 과목 위주로 구성했다. 임현택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은 “오늘은 총론 위주로 강의를 마련했는데 소아과 의사들이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을 수 있도록 분야별 강의를 마련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소아청소년과는 건강보험 의료 수가가 다른 진료 과목에 비해 낮고 비급여 진료가 많지 않다. 같은 숫자의 환자를 봐도 다른 과보다 수입이 낮다는 불만이 많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00만원인데,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1억875만원으로 전체 임상과 의사 중 가장 낮았다. 평균의 절반도 안 된다. 그동안 소아청소년과 의사들은 ‘박리다매’형 진료로 병원을 운영해 왔지만, 낮은 출산율로 영·유아가 줄면서 경영난을 호소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2017~2021년 5년간 전국에서 폐업한 소아과는 662곳에 달한다. 경기도에서 병원을 하는 소아과 의사는 “10년 전 처음 개원했을 때와 비교하면 환자 수가 10분의 1로 줄었다”고 했다.
악성 민원도 소아과를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한 소아과 전문의는 “지역 맘카페 등에 올라온 글 하나가 병원을 망하게 한다”며 “맘카페를 무기로 항의하는 보호자들을 만나면 진료 의욕이 뚝 떨어진다”고 했다. 의사 소통이 어려운 소아들을 진료하다 보니 소송 등에 휘말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2020년 74%에서 2021년 38%, 2022년 27.5%, 2023년 16.6%로 급감했다. ‘빅5′로 불리는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가톨릭중앙의료원, 세브란스병원 중에서도 서울아산병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달이었다.
그러나 소아과가 없어지면서 서울에서도 부모들은 3~4시간씩 기다려 아이 진료를 보기 일쑤다. 군 단위에선 소아과를 찾아 차로 몇 시간씩 떨어진 중소 도시로 달려가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소아 진료에 대한 수가 등을 인상하고 상급 종합병원에 소아 응급 전문의를 24시간 배치한다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소아과 탈출’을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란 분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