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이 지방자치단체에 생사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 출생 미신고 영·유아 23명 중 2명(경기 수원)이 살해된 데 이어 사망자 1명이 더 확인됐다. 작년 창원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한 여아였다. 1명은 살아 있으나 친모가 유기했다. 나머지 19명 중에서도 사망자가 더 있을 것으로 감사원은 추정한다. 출생 신고가 안 된 영아들의 비극적 현실이 잇달아 드러나고 있다.

그래픽=정인성
그래픽=정인성

보건복지부는 22일 “감사원이 발견한 미신고 아동 2236명을 포함해 의료 기관에서 발급한 ‘임시 신생아 번호’(출산 기록)만 있고 출생 신고 기록은 없는 영·유아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번 ‘영아 살해’ 등 비극의 근본 원인이 국가 제도 미비라는 비판 목소리가 높다. 정부 발표는 ‘뒷북’이란 지적이다. 정부와 병원은 영아의 출생신고를 확인하지 않고, 출생신고를 안 해도 ‘과태료 5만원’이 전부인 현 제도를 정부가 방치한 것이 영아들을 사지로 몰고 있다.

미국·영국·독일 등은 신생아가 태어나면 수일 내에 의료 기관이 당국에 출생 사실을 의무적으로 통보하도록 하고 있다. 출생신고가 안 된 아기는 방임·학대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병원에서 부모에게 ‘주민등록법상 1개월 이내에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 전부다. 부모가 안 하면 정부는 확인할 방법도, 의무도 없다. ‘영아 보호’에 대한 책임과 의무 방기다. 출생신고 전까지 공백기에 영아는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될 수 있다. 부모가 팔고,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가는 것이다. 인권을 강조하며 G8 진입을 앞둔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벌이는 일이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날 “부모와 상관없이 아동 출생을 사회에 알리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부가 매년 40조원이 넘는 저출산 예산을 쓰면서 정작 태어난 아기는 ‘안전의 사각지대’에 방치하는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정부는 2022년 3월 ‘의료 기관 출생 통보제’를 도입하는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출생 통보제는 의료 기관이 지방자치단체에 영·유아의 출생 사실을 의무적으로 통보하고,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이 확인되면 지자체장이 직권으로 가족관계등록부에 기록하는 제도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 2~3월 이 제도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87%가 찬성했다.

그러나 의사들이 반발하면서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복지부도 올 4월 재차 ‘출생 통보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지부진하다. 산부인과 의사 단체들은 “정부가 출생신고에 드는 비용과 인력을 의료 기관에 떠밀고 있다”고 했다. 임신부가 병원 밖에서 위험한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그런데 병원들은 신생아 출산 직후 의무적으로 접종해야 하는 결핵예방접종(BCG) 기록은 질병관리청에 빠짐없이 신고한다. 접종 기록을 제출하면 질병청이 지원금을 주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이번에 병원이 제출한 접종 기록과 출생신고 정보를 대조해 미신고 아동 2236명을 발견한 것이다. 미·영 병원은 출생 사실 통보를 의무이자 사회적 책임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래픽=박상훈

정부도 방치했다. 질병청은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의 ‘임시 신생아 번호’ 등이 담긴 결핵예방접종 자료를 갖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도 각 병원이 분만 진료비를 청구할 때 제출하는 신생아 정보를 갖고 있다. 정부는 출생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이 출생 자료들을 지자체 등에 통보한 뒤 출생신고가 실제 됐는지 확인했다면 영아 사망·실종은 사실상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정부가 보유한 데이터를 활용해 출생신고만 챙겼어도 살해된 영아 2명을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정부가 의지만 있으면 출생신고를 자동으로 할 수 있는 전산 시스템을 어렵지 않게 구축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는 병원별로 흩어져 있는 본인의 진료 정보를 휴대전화 앱으로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건강정보 고속도로’ 사업을 올 하반기 본격 시행한다. 올해 예산은 97억원이다. 정부의 ‘출생 통보제’ 시스템은 수십억원만 있어도 마련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6년 이후 정부가 쏟아부은 저출산 예산이 280조원에 달한다. 이 돈의 0.002%만 투자했어도 미신고 영·유아의 비극은 막았을 것이다. 정부도, 병원도 ‘출생신고’ 비용과 인력을 서로 미루다 최소 2236명의 대한민국 신생아를 생사도 확인할 길 없는 위험에 빠뜨린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한 IT 업체 대표는 “AI 시대에 IT 강국이라는 한국이 아직도 구청이나 읍·면 사무소를 찾아 손으로 출생신고서를 쓰거나 온라인으로 직접 기입해야 한다는 건 난센스”라고 했다. 의료 기관 중에선 법원과 업무 제휴된 247곳만 온라인 신청이 가능하다.

그래픽=박상훈

한국법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은 주(州)마다 출생신고 관련 제도가 다르지만 의료 기관이 출생신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주는 아동이 태어나면 의료 기관이 10일 안에 출생증명서를 작성해 지역의 출생·사망 등록 담당관에게 신고해야 한다. 뉴욕주는 아동 출생 후 5일 안에 병원에서 출생증명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영국은 출생 사실이 병원 시스템의 전산 정보를 통해 자동으로 당국에 통보된다. 독일, 캐나다도 의료 기관의 출생 통보를 의무화하고 있다.

현재 버려진 아동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유기 아동 보호소 ‘베이비 박스’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간 베이비 박스에 맡겨진 아동은 모두 1418명이다. 이 중 373명은 부모 상담을 통해 출생신고가 이뤄졌지만, 나머지 1045명은 미아 신고로 관할 구청에 인계돼 보육원으로 보내지거나 입양됐다고 한다. 미신고 영아 2236명과 1045명이 겹칠 가능성은 있다. 경찰이 파악한 영아 유기 건수도 매년 100~180여 명에 달한다. 베이비 박스 관계자는 “매년 얼마나 많은 영아가 버려지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고 했다.

병원이 아닌 곳에서 아동을 출산한 경우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10대 미혼모나 불법 체류자 등이 임신할 경우 출생 사실을 숨기려고 병원이 아닌 곳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유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