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려경(31) 순천향대 부속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지난 14일 KBM 여자 라이트플라이급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서 교수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현직 신생아분과 전담전문의다. 그는 이날 서울 섬유센터 이벤트홀에서 열린 타이틀전에서 임찬미 선수를 상대로 화끈한 강펀치를 선보이며 8라운드 38초 만에 TKO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는 “승리를 확정 짓는 순간 너무 짜릿했다”며 “병원 일과 복싱을 병행하느라 고생했던 지난날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고 말했다.
이날 KBM 여자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벨트를 획득한 서 교수는 2018년 동료 의사의 권유로 사각의 링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어릴 적 스피드스케이트와 스키, 수영 등을 배울 때 “선수를 해 보면 어떠냐”는 제안을 종종 받을 정도로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다고 했다. 의사 일을 하면서도 짬을 내 꾸준히 헬스장에 다니며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글러브를 꼈을 때, 펀치는 어떻게 날리고, 스텝은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낯설었지만, 차근차근 기본기를 익혔다고 했다. 그는 “소아과 전공의 시절, 신생아분과에서 전임의로 일할 때도 당직이 아닌 날은 하루에 한두 시간씩 꼭 훈련을 했다”고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정말 몸이 가루가 된 것처럼 힘들었지만, 체육관에 갔다”며 “짧은 시간 복싱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했다.
서 교수는 “복싱은 자신감을 준다”고 강조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보면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급박하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많은데, 복싱을 하면서 얻은 자신감이 이 같은 상황에서 스스로를 믿고 정확하게 조치할 수 있는 힘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아픈 신생아들이 모인 중환자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압박과 긴장감 등 스트레스가 상당한데, 복싱을 통해 이를 해소한다”고 했다. 서 교수는 “링 안에서 스트레이트 펀치가 깔끔하게 먹힐 때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했다.
의사 일과 복싱 선수 생활을 병행하는 건 쉽지 않았다고 서 교수는 말했다. 2020년 프로 무대 데뷔 당시에도 “괜히 몸 다칠 수 있다. 그냥 취미로만 하면 안 되겠느냐”는 우려 섞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선수로 뛰어보고 결정하자고 마음먹었고, 그 결정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병원 일과 복싱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힘들고 어려운가 묻자, 그는 “둘 다 막상막하”라고 했다. 복싱은 강한 상대와 맞서기 위해 훈련 강도가 점점 세지는데, 병원 생활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서 교수의 경기 모습을 담은 유튜브 동영상에는 댓글이 여러 개 달렸다. ‘기본기가 뛰어나고 특히 원투 스트레이트가 깔끔하고 위력적이다’ ‘굴하지 않는 일전불사의 투지로 다음 경기가 기대된다’는 분석 및 전망과 함께 ‘이길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준비 많이 하고 나왔네요’ 같은 격려의 글이 잇따랐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의사만 하세요, 직업 복서들 밥줄 다 끊겠네’ 같은 재미난 댓글도 있었다.
서 교수를 지도한 손정수 관장은 “다들 타고난 복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연습량이 엄청나게 많은 선수”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본 여성 선수 중 서 선수의 주먹이 가장 센 것 같다”며 “폭격기 같은 복서”라고 했다. 키 163㎝, 몸무게 48㎏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공격력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원투 펀치로 상대를 그로기까지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오른손잡이 복서인 서 교수의 주무기는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레프트 훅이다.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상대를 TKO시킨 것도 강력한 레프트 훅이었다. 서 교수는 이날 승리로 7전 6승(4KO) 1무의 통산 전적을 기록하며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복싱 전문가들은 “상대가 어떤 전법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인파이팅, 아웃복싱을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서 교수는 “2년 안에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손 관장은 “처음 복싱을 배우러 왔을 때부터 서 선수는 일반 여성에 비해 성장 속도가 3배나 빨랐다”며 “세계 챔피언도 충분히 가능하다. 앞으로 맞붙을 상대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