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8일 한의사도 의료 기기인 뇌파계(腦波計)를 사용해 치매나 파킨슨병 등을 진단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한의사 A씨가 “뇌파계를 썼다고 면허정지 처분을 내린 것은 부당하다”며 보건복지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 상고심에서 한의사 손을 들어준 것이다. 소송이 제기된 지 10년 만에 한의사도 진료 때 뇌파계를 쓸 수 있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왔다.
뇌파계는 뇌 활동을 파동 형태 그림으로 나타내는 의료기기다. 독일에서 개발한 서양의학의 산물이다. 그런데 서울 서초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한의사 A씨는 2010년 9월부터 3개월간 이 뇌파계를 써서 파킨슨병과 치매 진단을 내렸다. 한 매체에 ‘40~50대 파킨슨병 뇌파 검사로 진단’이란 제목의 광고도 냈다. 그러자 보건복지부는 A씨에게 면허정지 3개월 처분을 내렸다. 한의원이 뇌파계를 쓴 것은 의료법상 금지돼 있는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 행위’라는 이유였다. A씨는 중앙행정심판위에 재결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
소송의 핵심 쟁점은 한의사의 뇌파계 사용이 한의사 면허 범위를 넘어선 ‘불법 의료 행위’인지였다. 1심은 ‘불법’으로 봤다. 1심 재판부는 “한의학은 선조들에게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방 및 치료 행위와 이를 기초로 한 과학적 응용 치료 행위”라고 했다. 한의사가 서양의학의 발명품인 뇌파계를 사용한 것은 ‘전통적 예방·치료 행위’로 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2심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뇌파계를 사용한 것은 한의학상 절진(진맥)의 현대화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1심과 달리 한의사도 뇌파계를 쓸 수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을 거의 그대로 수용했다. 대법원은 A씨의 뇌파계 사용이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 행위’가 아니라는 3가지 판단 근거를 제시했다.
먼저 대법원은 “관련 법령에 한의사의 뇌파계 사용을 금지하는 취지의 어떤 규정도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또 뇌파계는 위해성이 낮고, 기기를 쓰는 데 특별한 임상 경력이나 전문 지식도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뇌파계는 식약처의 의료 기기 분류에서 위해성이 낮은 2등급을 받았는데, 이 등급엔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일부 혈압계와 체온계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한의사의 뇌파계 사용에 대해 “기기를 이용한 망진(望診·눈으로 환자 상태 관찰)이나 문진(聞診·듣는 것)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대한의사협회는 “국민 생명을 위협하는 경악할 판결”이라고 반발했다. 의사협회 관계자는 “뇌파계 검사는 치매, 파킨슨병 진단 시 활용하는 여러 검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며 “한의원에서 뇌파계에 의지해 진단할 경우 치매, 파킨슨병 오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치매와 파킨슨병은 초기 치료가 특히 중요한데 오진이 생기면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의사협회 관계자는 “한의원이 뇌파계 검사를 남용하면 환자들의 진료비 부담도 커질 것”이라고 했다. 반면 대한한의사협회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결”이라고 환영했다. 한의사협회 관계자는 “뇌파계의 위해성은 일반 체온계 수준으로 낮고, 다루는 데 전문 지식도 필요없다”며 “이런 규제를 없애 국민의 진료 선택권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또 한의사들은 “한의원에서도 진단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만 뇌파계를 이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뇌파계
뇌파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검사하는 장치. 전극을 두피에 대고 뇌의 활동을 전기 신호로 만들어 증폭하여 그림으로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