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가 촌각에 달린 환자를 구하는 의사를 ‘바이털(생명) 의사’라고 한다. 필수 의료 분야 의사들이다. ‘생명을 살린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밤을 새우며 환자를 보는 바이털 의사들을 소개한다.

고현선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태아의 가슴에 물이 차올라 치료했던 산모의 초음파 사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 교수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분만실은 '병원에서 가장 반짝이는 곳'"이라며 "아픈 아기들이 최상의 건강 상태로 세상 빛을 보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고현선(50)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20년 넘게 분만실을 지키고 있다. 기저 질환이나 자궁 질환을 가진 고위험 산모를 주로 담당한다. 고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분만실은 ‘병원에서 가장 반짝이는 곳’”이라며 “아픈 아기들이 최상의 건강 상태로 세상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는 “새벽 3시 응급 콜을 받고 나가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고, 의료 소송에 대한 부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며 “아기들이 건강하게 태어나도록 돕는 일에 가슴이 뛰는 후배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진료할 수 있어야 우리나라 미래가 밝아질 것”이라고 했다.

-산과(産科)를 선택한 이유는.

“산부인과를 지원했던 20여 년 전만 해도 여성, 특히 엄마의 건강은 가족 중 늘 마지막 순서였다. 엄마의 건강을 지켜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 산부인과를 택했다. 전공의 생활을 하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돕는 산과 일에 매료돼 지금까지 분만실에서 일한다. 산모와 10개월 동안 울고 웃으며 진통과 분만이라는 ‘극한의 과정’을 함께하면서 보람을 느낀다.”

-’고위험 임신’이 주력 분야인데.

“산모나 태아에게 합병증이 생기기 쉬운 경우를 고위험 임산부라 부른다.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기저 질환을 갖고 있거나, 근종이나 난소 물혹 같은 자궁 질환이 있는 산모를 많이 만난다. 유산이나 조산 등을 겪은 산모가 다시 임신하는 경우 여러 가지 합병증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고위험 임산부가 많이 늘었나.

“만혼으로 고령 산모가 많아지면서 전국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점점 안 좋아지듯, 정자와 난자 기능도 떨어져 태아의 염색체 이상 위험이 커진다. 산모 나이가 많으면 임신 전 질환을 앓을 확률이 높아지는데, 임신 중 합병증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고현선 교수가 산모들에게 전달하는 '작은 엽서'. 뒷면에는 '이 어머니가 풍성한 복을 받고 아기와 함께 기뻐하게 하소서'라고 신에게 기원하는 글이 적혀 있다. /고현선 교수

-지금까지 진료한 산모는 얼마나 되나.

“세어본 적이 없다. 일주일에 나흘 동안 하루 30명의 외래 환자를 본다. 지금 돌보는 입원 환자는 12명 정도다.”

-하루 일과는 어떤가.

“평일은 대부분 오후 10~11시쯤 퇴근한다. 토요일은 6시에 퇴근한다. (휴일에도) 응급 환자가 생겼다는 연락이 오면 나도 모르게 병원으로 뛰어간다. 저에게 모든 환자는 ‘VIP’다. 임신 초기에 오면 10개월 동안 함께하니까 VIP, 임신 중기에 오면 아기나 엄마에게 문제가 있어서 오는 거니 VIP, 임신 말기에 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응급 환자인 경우가 많으니까 VIP 아닌가.”

-급박한 상황은 자주 발생하나.

“그렇다. 분만실은 응급 상황이 많은 곳이다. 이곳을 지키는 의사들에게 ‘5분 대기조’ 생활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가 갑자기 나오거나, 산모에게 출혈이 크게 발생하면 외래 진료를 보다가도 산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술실로 뛰어올라간다. 그래도 새벽 3시 응급 콜 받고 나가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동료 교수들도 그렇다고 한다.”

-당직은 자주 서나.

“아직은 전임의가 3명이라 병원에서 자면서 하는 당직은 서지 않는데, 조만간 서야 할 것 같다. 분만실 의료 사고에 대한 부담이 점점 커지면서 전임의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작년 서울성모병원 모체 태아 분과에는 전임의가 4명이 있어 다른 병원들이 부러워했는데, 올해는 한 명이 줄었다. 내년에는 2명이 된다. 그다음엔 들어올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기억에 남는 태아나 산모는.

“4년 전쯤 대동맥 판막 협착증을 치료했던 태아가 기억난다. 태아의 심장에서 대동맥으로 나가는 문이 좁아지면서 심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병이다. 치료하려면 산모 복부를 통과해 태아의 가슴과 심장을 뚫어 카테터(가느다란 관)를 삽입한 뒤, 심장에서 대동맥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시술이 필요하다. 당시 국내에는 실패 사례만 있었다. 10여 년 전 시술도 못 하고 태아를 잃은 적이 있어 절실했다. 시술 성공 사례가 많았던 하버드대 병원 연구진에게 직접 연락해 조언을 구했다. 결국 시술에 성공해 의료진들과 얼싸안고 기뻐했다. 건강하게 자란 아이는 건강검진을 받으러 우리 병원을 찾는다.”

-산모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때도 있을 텐데.

“그런 경우가 많다. 만삭이 되기 전 엄마 배 속에서 태아가 하늘나라로 떠나거나, 태어나더라도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도 각종 질환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꾸준히 공부해 부모들에게 ‘최신 정보’와 ‘최선의 치료 방법’을 알려 드리는 게 제 역할이라 생각해 늘 연구한다.”

-산과 의사로 지내며 특히 힘들었던 순간은.

“저를 포함한 산과 의사들은 분만 후 예기치 못한 과다 출혈 등으로 엄마나 아기의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지거나, 심하면 하늘나라로 가는 사고를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분만실을 지킨다.”

-오랜 세월 분만실을 지킬 수 있게 한 원동력은.

“과거에 인연을 맺은 산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올 때 정말 감사하다. 새벽 응급 수술을 마치고 몽롱한 상태로 외래를 보고 있거나, 스트레스가 높을 때 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확 밝아진다. 산모들이 회복한 뒤 카드나 편지를 보내주는 것도 큰 기쁨이다.”

고 교수는 “지난달 임신성 고혈압으로 제왕절개를 한 산모가 무사히 분만한 뒤 퇴원하면서 ‘교수님 사랑해요’를 외쳤다”며 “출산 전에는 진료마다 눈물을 보였던 환자였는데,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고 했다, 그는 “’감사하다’는 인사는 많이 들었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오랜만이라 많이 웃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의료 소송에 대해 산과 의사들이 느끼는 부담은 어느 정도인가.

“최근 임신과 출산 관련 소송들은 (배상액이) 10억원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국가에서 무과실이 증명된 사건들에 한해 3000만원까지 지원해 준다. 한번 의료 소송에 휘말리면 분만실 문을 닫아야 한다는 의미다. 불가항력적인 무과실이라면 한도 제한 없이 정부가 소송 관련 비용을 전액 지원해줘야 한다.”

-분만실 운영이 쉽지 않다고 하는데.

“분만실은 응급 수술이 필수적이라 큰 공간이 필요하고, 24시간 운영해 인건비도 많이 들어간다. 저출생 심화로 젊은 부부들이 많지 않은 지방에서는 분만실을 통해 큰 이윤을 얻기는커녕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다. 부인과 클리닉 차리는 게 이득이다. 국가에서 분만실 유지를 위한 최소한 비용은 지원해줘야 한다.”

-’필수 의료’ 분야의 의사 부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결국 돈 문제다. 의료 소송 비용을 전액 지원하고, 획기적인 수가 인상을 통해 어느 정도의 수입을 보장해야 한다. 필수 의료과 전공의를 최소한 2년 해야 인기과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만하다.”

-산과 선택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평소 후배들에게 ‘산부인과에는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산과 외에도 여성 건강을 책임지는 부인과도 있으니, 분만실을 열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같은 현실적인 얘기를 해주는 편이다. 그래도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분만실은 병원에서 ‘가장 반짝이는 곳’이다. 아기들이 건강하게 태어나고 한 여성이 엄마로 다시 태어나는 중요한 시기에 옆에서 돕는 것은 가슴이 뛰는 일이 아닌가.”

☞고현선 교수

1998년 가톨릭대 의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과 2013년 가톨릭대 의학 석사와 박사를 각각 받았다. 산부인과 여러 분과 중 산모와 태아의 진료를 담당하는 ‘모체 태아 분과(산과)’에서 근무하며 20년 이상 분만실을 지키고 있다.